교황 에우제니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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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니오 3세는 유럽 대륙을 전전하며 파리,<ref>J.-D. Mansi (ed.),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editio novissima Tomus XXI (Venice: A. Zatta, 1776), pp. 707-712. Carl Joseph Hefele, ''Histoire des conciles d'après les documents originaux'' [https://archive.org/details/histoiredesconci51hefele Tome V, première partie] (Paris: Letouzey 1912), pp. 812-817.</ref> [[랭스]](1148년 3월),<ref>Mansi, pp. 711-736.</ref><ref>P. Jaffe,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Leipzig: Veit 1888), pp. 52-53.</ref> [[트리어]](1147년)<ref>Mansi, pp. 737-738. Hefele, pp. 821-822.</ref>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쓴 글들을 심사숙고한 끝에 인가하였다. 1148년 6월 에우제니오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비테르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는 1149년 4월 8일 [[투스쿨룸의 프토레매우스 2세]]의 요새로 피신하여 그곳에 머물며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루이 7세와 그의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만남을 가졌다. 그는 그곳에서 11월 7일까지 머물렀다. 1149년 11월 말에 그는 시칠리아 군대의 힘을 빌려 로마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으나, 공화주의자들의 거센 반대로 곧 다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1150년 6월).
 
[[File:Mort Eugéne III.jpg|thumb|upright|right|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선종]]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의 반란군에 맞서 교황을 돕겠다고 약속했으나 1153년 7월 8일 에우제니오 3세가 티볼리에서 선종함으로써 이행되지 못했다. 로마 시민들은 교황이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항상 인지하고 있었지만, 교황의 세속 권력을 주장한 에우제니오 3세의 입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교황의 개인적 인품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그런 이유로 에우제니오 3세의 시신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바티칸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곧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 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