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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武裝親衛隊, {{lang|de|Waffen-SS|바펀에스에스[ˈvafən.ɛs.ɛs]}})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나치)|친위대]](Schutzstaffel) 소속 무장 전투집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육·해·공군에 이은 제4의 군대로 활약했다. 총사령관은 SS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였으나, 전쟁 기간 중 전투 지휘는 [[독일 국방군|국방군]](Wehrmacht) [[국방군 최고사령부|최고사령부]](OKW)의 지휘를 받았다.
 
비록 첫 출발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의 지도부를 경호하는 소박한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무장친위대는 90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전투 사단과 기타 엘리트 부대를 갖춘 군대로 성장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무장친위대는 잔혹 행위에 가담한 것 때문에 [[전범 단체]] 단체로 간주하였고, 무장친위대의 베테랑들은 다른 독일군 참전 군인들과 달리 군인으로서 많은 권리를 거부당했다. 그러나 다수의 징집병은 독일 정부에 의해 무장친위대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범죄자 낙인에서는 제외되었다. 한때 국방군은 순전히 전투에만 집중했고 약탈과 강간, 학살은 이들 친위대만이 도맡아서 한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부정되고 있다. 전후 서독군을 재건하면서 국방군에 비해 비교적 소수에다가 나치당의 사병이란 이미지로 굳어진 친위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 때문에 그러한 인식이 발생하였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국방군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친위대보다 많을 것이란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들 친위대는 막강한 전투력과 엄격한 군기와는 별개로 잔혹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나 전쟁 초기인 1941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나 학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무장친위대 산하의 인종말살부대가 국방군과 함께 유대인들을 체포, 학살하는데 열을 올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장친위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울 하우서]]의 엄명으로 군기는 1943년 초반까지 확실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군기도 점차 헤이해지는데다가 독일이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일대에 초토화 작전을 개시하면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빨치산에 대한 토벌과 무고한 주민들도 빨치산 협력자로 몰아 처형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상당한 특권과 사회적 지위 보장, 최신무기와 전투장비를 갖추었다. 무기가 부족해도 최우선 지급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