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태그: m 모바일 웹
15번째 줄: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 [[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94r_0010_0010_0090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ref>
 
[[서희]]의 아들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서정 (고려)|서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 (고려)|서균]](徐鈞)이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우복야(右僕射), 현손인 [[서공]](徐恭)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서순]](徐淳)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03_494_021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