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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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년]] 무렵 카를로만은 [[바이에른]] [[백작]] [[라톨드]](Ratold)의 딸이자, 백작 지기하르트(Sigihard)의 처제인 리트빈데와 정을 통하였다. 이는 부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그의 첫 독립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바이에른]]과 가깝게 지냈고, 850년을 전후하여 아들 [[아르눌프 폰 케른텐|케른텐의 아르눌프]]가 태어난다. [[860년]] 무렵 그의 다른 동생인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루트비히 3세]]의 사생아 [[위그]] 등 다른 형제들의 사생아 역시 할아버지이기도 한 독일인 루트비히의 [[코블렌츠]] 궁정으로 불러들여, 양육한다.
 
리트빈데는 [[바이에른]]의 [[백작]] 에르네스트(Ernst, [[879년]] [[8월 8일]] 사망)의 여동생이었는데, [[861년]] 카를로만은 다시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에른 백작 에르네스트의 딸 리트빈데와 결혼하였다.<ref>Konecny Silvia: Die Frauen des karolingischen Königshauses. Die politische Bedeutung der Ehe und die Stellung der Frau in der fränkischen Herrscherfamilie vom 7. bis zum 10. Jahrhundert. PhD thesis Vienna 1976, p. 139</ref> 일설에 의하면 아르눌프의 생모는 에르네스트의 여동생이 아니라 이때 결혼한 에르네스트의 딸이 그의 생모라는 설도 있다.<ref>[http://gallica.bnf.fr/ark:/12148/bpt6k215043h/f128.image#ES Annales Bertiniani, pag 106] <small>'''(라틴어)'''</small></ref> 리트빈데의 아버지는 [[노스가우]]의 [[변경백]]을 지낸 에르네스트이고 어머니는 프로멘 출신 프레데부르가(Fredeburga)였다. 카를로만의 정비 이르멘트루드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정부였던 [[리트빈데]]는 아르눌프와 헤드비가(Hedwiga, 854~?) 남매를 낳아 주었다. 카를만은 [[861년]]을 전후한 무렵, 카를로만은 아들 아르눌프를 사생아에서 적자로 올려주고자 이르멘트루드와 이혼하고 리트빈데와 결혼하였다.<ref>서자로 남을 경우 왕위 계승권에 대해 교회에서 반대를 제기할 우려가 있었다.</ref>
 
=== 군사 활동과 쿠데타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