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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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와 퇴각 ====
그러나 풍토병과 [[간질]], [[뇌졸중]] 등의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라둘프]]와 [[베렌가리오 1세|베렌가르]]를 대리인으로 지목하고, 897년 초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전쟁을 마치고 [[바이에른]]으로 되돌아온 아르눌프는 [[뇌졸중]]으로 한동안 통증을 겪었다. [[뇌졸중]] 외에도 눈꺼풀에 [[사면발이]]에 의한 가려움증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아르눌프에게 패하고 교황이 폐위를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람베르트]]는 승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법한 황제임을 주장했다. 아르눌프는 아들 [[라톨드]]를 [[이탈리아의 왕]]에 임명하고 [[파비아]]에 남겨두었으나 람베르트 일파의 공격으로 도주하고 만다. [[람베르트]]는 [[896년]] [[2월]]에 자신의 폐위를 주도한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그 반대파였던 [[교황 스테파노 6세]]와 함께 그의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교황의 옷을 입히고 재판, 포르모소의 교황 즉위식과 법령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부관참시하기도 한다.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라톨드]]와 [[베렝가리오 1세]]는 도주했고, 람베르토는 마기눌프를 비롯, 아르눌프가 임명했던 궁재 및 그에게 협력한 귀족들을 살해했다. 아르눌프는 바로 군대를 보내 람베르트 일파와 전쟁을 한다.
 
896년 8월 그는 병중에 포르츠하임에서 귀족들을 소집하였다. 이때 사고로 건물 발코니가 붕괴하기도 했다. 896년 11월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보낸 사신들을 병석에서 영접했다.
 
개인적으로 아르눌프는 [[이탈리아]] 북부지역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르눌프는 자신의 서자 중 한명인 [[라톨드]]를 [[이탈리아 왕]]에 봉해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밀라노]]까지 획득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 후 아르눌프는 계속해서 병에 시달렸는데 의 소문에는 아르눌프가 반대파에 의해 중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교황은 수시로 아르눌프에게 개입을 요청했지만 그 이후에 아르눌프는 더이상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모라비아]]와 [[마자르 족]]도 수시로 동프랑크의 영토를 습격하였다. [[898년]] [[1월]]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한 [[샤를 3세 (서프랑크)|샤를 3세]]가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로렌의 변경을 공략, 이어 [[츠벤티볼트]]에게 퇴위를 강요했지만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동시에 로트링겐에서도 아르눌프 생전에 이미 츠벤티볼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는 개입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