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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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전쟁]](War of Devolution, 1667-68년)이 시작되자 결과적으로 [[콩데]]와 뤽상부르는 아직 사령관이 되지 않았지만, 제2차 전역기간 그는 콩데 휘하 중장으로 근무하면서 [[프랑슈콩테]]를 정복했다. 평화롭지만 더러운 해를 보냈던 뤽상부르는 [[루부아 후작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루부아]](Louvois)의 호의로 양성되어 1672년 네덜란드를 진압하는 고위급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우오든]](Woerden)에서 [[윌리엄 3세|오라녜 공]]을 패배시켰으나 [[네덜란드 홍수선]](Dutch Water Line)에 멈추어야 했다. 1673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위트레흐트]]와 [[마스트리히트]]에서 적군 70,000명의 정면에서 단지 20,000명에 불과한 아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켰다. 이 공적으로 그의 위치는 장군 중에서는 최고 계급이 되었다.
 
1674년 뤽상부르는 창설된 [[가르드 뒤 코르]](Garde du Corps)의 지휘관이 되었고, 1675년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1676년 그는 [[라인군]](army of the Rhine)의 최고사령관의 지위에 있었으나, 필립스부르크(Philipsburg)의 밖에서 로렌 공작(Duke of Lorraine)을 붙잡는데 실패했다. 1677년 그는 [[발랑시엔]] 급습과 1678년 [[오라녜 공]]을 [[생드니 전투 (1678년)|생드니]](St Denis)에서 패배시키고 뒤이어 [[네이메헨네이메헌 조약]](Peace of Nijmegen)에 서명하게 했다. 뤽상부르의 명성은 단숨에 높아졌고, 그의 명성은 루부아의 시기를 불러 일으켜 "[[라부아쟁|독살 사건]]"(affair of the poisons)이 일어났을 때 그가 연루되어 있는 것이 되어 [[바스티유]]로 보내지게 되었다. [[카미유 루세|루세]](Rousset)는 자신의 저서 ''루부아의 역사''(Histoire de Louvois)에서 이들 사이에 벌어진 다툼은 아마 거짓이라고 보고 있었다. 뤽상부르는 1680년 바스티유에서 몇 달 동안 보내다 풀려났으나, 그러나 그가 갖고 있던 ''capitaine des gardes'' 궁전은 양도해야 했다.
 
=== 대동맹 전쟁 1688-9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