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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58년]] 무과 급제 후 [[경성판관]],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하여 [[1583년]] [[함경도]] [[경원군|경원]] 부사로 [[이탕개의 난]]을 진압하였다. [[1586년]] 이탕개가 다시 [[회령군|회령]]을 재칩입하자 이를 다시 물리쳐 [[1587년]] [[함경북병사]]가 되었으나, [[1588년]]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 맞서지 않고 부하들과 도망쳤다가 도망치길 거부하고 혼자 남은 [[이순신]](李舜臣)과 [[이경록]]이 토벌했다. 그러나 이일은 자신이 도망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순변사 이일은 왜군을 막기 위해 상주로 내려가려 했으나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한 사실 때문에 이일은 군관들로부터 평가가 좋지 못했고 그래서 모두들 이일의 부장이 되려고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이일은 장기군관 50명을 이끌고 병력은 현지에서 징집하기로 해서 [[상주 전투|상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징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도 이일을 따라 온 장기군관 50명 중 20명 이상이 도주하여 크게 패했다. 원래 5000명 이상 징집해야 왜구를 막을 수 있었으나 이일이 징집한 병력은 고작 800명 수준이였으며 그나마 그 병력도 전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도망쳐 실제로는 훨씬 적은 병력이였다. 이후 이일은 [[충주시|충주]]에 주둔한 [[신립]](申砬)의 군대로 도망쳤다. 그러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자 [[황해도]]와 [[평안도]]로 도망쳤다. 이일은 도망치면서 조선 양민을 죽이고 그 시체를 왜병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시체의 상투를 일본식으로 다시 틀고 목을 베어 소중히 간직했다. [[1592년]] [[5월 17일]]~[[5월 18일]]에 일어난 [[임진강 전투 (1592년)|임진강 전투]]에 참여했으나 또 다시 패배했다. [[1593년]] [[1월 6일]] [[제4차 평양성 전투|평양 전투]]에 참여해 [[평양성]]을 탈환했고 [[1594년]] [[송유진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서 이를 진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