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총재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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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력 3년 헌법 제정==
{{본문|방데미에르의 반란}}
테르미도르파는 1795년 혁명의 색깔이 너무 강한 [[1793년 헌법]]을 수정하여 《[[공화국력공화력 3년 헌법]]》(또는 [[1795년 헌법]])을 제정했다. 2개월 면담 후인 [[1795년]] [[8월 22일]]에 [[보통선거제]]의 채택 여부를 묻는 투표를 하여 찬성 투표수 105만, 반대표는 불과 5천 표로 통과시켰다.
 
헌법을 개정을 통해 실시되는 최초의 선거에서는 테르미도르파보다 [[왕당파]]가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테르미도르파는 "은퇴 의원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의원에 출마하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고 주장하고 [[국민 공회]]에서 2/3 이상의 의원을 유임시키는 법안을 제출하고, 헌법과 함께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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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3월부터 4월까지 선거에서 공화파가 약진했다.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총재정부의 권위가 상승했다. 5월, 루벨이 은퇴하고 후임으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되었다.
 
시에예스는 [[공화국력공화력 3년 헌법]]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총재정부의 인기가 침체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읽어 냈다. 시에예스는 권력을 잡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공화파의 힘을 억제하려고 했다. 시에예스는 바라스와 손을 잡고, 다른 3명의 총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6월 16일]], 의회는 총재 트레야르의 취임을 무효로 하고, 두에와 라 루베리에르를 플로레알 22일 쿠데타의 장본인으로 지목하고 해임을 요구했다. 결국 [[6월 18일]](프레리알 30일) 이것이 인정되었다. 이것을 프레리알 30일 쿠데타라고 부른다. 후임은 고이에르, 뮬랑과 듀코가 되었다. 새로운 총재가 된 세 명은 실정이야 없었지만, 권위도 거의 없었다. 행정부의 각 장관도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