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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주군|함주]] 출생이다.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원산시]]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민요]]와 [[동요]]를 연구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벌교노동조합총회시 사상고취 사건]]에 연루<ref>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 [http://student.gen.go.kr/index.asp?part=04&menu=d_03&code=55 벌교노동조합총회시사상고취사건 (1928년)]</ref>되어 교직을 그만두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다떠났다. [[니혼음악학교]]에서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고 [[1933년]] [[서울]]로 돌아온 이면상은 이후 민요를 작곡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초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내용에 민족 의식이 은근히 담긴 민요풍의 음악을 작곡했다. [[1933년]]에 만들어진 〈폐허에서〉가 민족적 정서를 담은 현실 비판적 가사 때문에 금지곡 판정을 받은 것이 그 예이다.<ref>《연합뉴스》 (2006.12.6){{뉴스 인용
|제목=일제시대 `검열 통제 실태` 한눈에</ref>
|출판사=연합뉴스
|작성일자=2006-12-06
|저자=홍정규
}}</ref>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시국 가요를 창작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1937년]] 열린 '황국위문조성 조선문예회 신작발표애국다교대회’에 시국 가요 네 편을 출품한 기록<ref>한국 근대음악의 원형, [http://music.culturecontent.com/group/sub06_15.asp?code=6&intro=1 애국가곡 국민가곡으로 지칭한 시국가 ]</ref>이 있으며, 이후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사여〉, 〈총후의남(銃後義男)〉등 군국 가요를 잇따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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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곧바로 북조선에서 함남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을 지내 북조선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에도 뽑혔다.
 
이면상은 [[김순남 (작곡가)|김순남]] 등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남로당]] 계열의 월북 음악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평양음악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ref>《프로메테우스》{{뉴스 (2006.8.13) [인용
|url=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20/20060813/20060813190300.html
|제목=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ref>
|출판사=프로메테우스
|저자=차문석
|작성일자=2006-08-13
|확인일자=2008-06-05
}}</ref>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신민요 음악으로는 [[김상희 (가수)|김상희]]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울산 큰애기〉가 유명하다. 북조선에서는 〈빛나는 조국〉, 〈눈이 내린다〉, 〈영광의 땅 보천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다수 창작하고 [[혁명가극]]으로 발전한 가극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