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첼로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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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네세 추기경이 로마로 소환된 후에도 마르첼로는 계속 네덜란드에 머물렀다. 이후 10년간 마르첼로는 [[레조칼라브리아 현|레조]]와 [[구비오]]의 임시 관리 교구장을 겸하게 되었다.<ref name="CE"/> 로마에 있는 그의 집은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마르첼로 본인도 당시 주요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ref>Cardella, 226: la di lui famiglia piena fosse di uomini dotti, scientifici, e letterati, ed egli mantenesse stretta corrispondenza con Angelo Coluzio, Costantino Lascari, ed altri uomini dotti, ed eruditi di quei tempi.</ref>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는 [[레지널드 폴]] 추기경과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 추기경(훗날의 [[교황 율리오 3세]])과 더불어 공의회를 주재하는 세 의장들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EB1911/> 그는 바오로 3세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계속 공의회 의장을 맡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회유하기 위해 교체되었다. 그는 정통 신앙과 교회 규율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세속적 문제에 대해서 교황이 가장 높은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여 황제의 진노를 샀다. 1548년(또는 1550년) 마르첼로는 [[바티칸 도서관]] 관장감독관(Protettore della Biblioteca Apostolica)에 임명되었다.<ref>Isidoro Carini, ''La Biblioteca Vaticana'' seconda edizione (Roma 1893), 59–61.</ref>
 
그를 임명한다는 교황 소칙서는 1550년 5월 24일 새 교황 [[교황 율리오 3세|율리오 3세]]에게서 나왔는데, 바티칸 도서관 사서가 아니라 거룩한 로마 교회의 사서(Bibliothecarius Sanctae Romanae Ecclesiae)라는 직함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도서관을 담당하게 된 최초의 추기경이었기 때문이다.<ref>Domenico Zanelli, ''La Biblioteca Vaticana'' (Roma 1`857) 28–29.</ref> 임기 동안 그는 특히 기독교 고고학 문제에 대한 조언을 받은 오누피로 판비니오 뿐만 아니라 마르첼로와 실레토 등을 기용하였다. 그는 그리스어 필사본 143권을 포함하여 바티칸 도서관에 500여권의 필사본을 비치하고 이들 목록을 손수 기입하였다. 이 기입장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Vaticanus Latinus 3963).<ref>Zanelli, ''loc. cit''.</ref>
 
1549년 12월 3일 바오로 3세의 후임자를 뽑는 콘클라베(1549-1550)가 소집되어 마르첼로 체르비니를 포함하여 총 51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다. 처음 표를 받은 후보는 폴 추기경과 스폰드라티 추기경, 카르피 추기경, 리돌피 추기경이었다. 카를 5세의 지지를 받은 폴은 첫 번째 투표에서 두 표를 받았지만, 이후 더이상의 표를 받지는 못했다. 카를 5세의 지지를 받은 또 다른 후보로는 스페인 부르고스 교구장 후안 알바레즈 데 톨레도가 있었지만, 전임 교황 바오로 3세의 조카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프랑스인 추기경들의 강한 반대로 그 역시 낙선하였다.
 
12월 12일, 프랑스 진영에서 다섯 표 이상의 표가 이폴리토 데스테에게 던져졌으나 더이상의 표를 얻지는 못하자 마르첼로 체르비니 추기경을 유력 후보로 내세웠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그의 당파 역시 마르첼로에게 긍정적으로 기울였으나, 황제의 진영은 그렇지 않다.<ref>{{cite web|author=Prof. John P. Adams, Modern and Classical Languages and Literatures |url=http://www.csun.edu/~hcfll004/SV1549.html |title=Sede Vacante of 1549–1550 |publisher=Csun.edu |date=2012-11-13 |accessdate=2013-06-23}}</ref> 유감스럽게도 마르첼로는 열이 나서 12월 22일 콘클라베를 떠나야만 했다. 최종적으로 추기경들은 1550년 2월 7일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며, 그가 바로 교황 율리오 3세이다.<ref>Onuphrio Panvinio, "Marcellus II" in ''Historia B. Platinae de vitis pontificum Romanorum ... ad Paulum II...annotationum Onuphrii Panvinii ... cui, eiusdem Onuphrii ... Pontificum vitae usque ad Pium V'' (Colonia: apud: Maternum Cholinum MDLXVIII), 425: Defuncto Paulo III quum in eius locum isdem Cardinalius Iulius III vocatus, quo cum arctissimae amicitiae nexu coniunctus erat, pontifex factus esset, absens (conclave enim adversa valetudine conflictatus exierat) primum per nuntium ei gratulatus est, mox viribus parumper recuperatis, cum Urbe egredi ad salubriora loca medicorum consilio statuisset, se sellae impositus, ad Pontificem deferri curavit.</ref>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