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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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이후 ==
1950년 11월 7일 티베트 정부는 [[유엔]] 측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한 대응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유엔은 [[한국 전쟁]] 개입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분쟁에 개입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정식 독립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티베트 정부가 유엔 측에 보낸 문서가 티베트가 아닌 인도에서 발송되었기 때문에 진짜 문서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엘살바도르]]는 [[유엔 총회]]에서 티베트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유엔 총회는 "티베트, 중국, 인도의 평화에 관한 문제를 유엔에서 논의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또한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자국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적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침공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인민해방군은 창두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응가포 응가왕 지그메를 석방시켰고 라싸로 파견했다. 지그메는 달라이 라마와의 협상에서 인민해방군 대표로 참석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가 평화적으로 해방된 경우에는 티베트의 상류층이 지위, 권력을 유지한다고 약속했다. 티베트는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대표를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는 베이징에서 [[십칠조협의]]를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