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호노리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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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오 3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도 십자군 원정을 망설였으며, 1221년 9월 8일 이집트 원정은 [[다미에타]] 상실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유럽의 통치자들 대부분은 이미 자기만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터라 본국을 비우고 떠날 수가 없었다.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와 얼마 후에 [[니더라인]](라인강 하류) 지방에서 모은 십자군 함대가 마침내 거룩한 땅으로 떠났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몇몇 곳을 점령했지만, 그리스도인들끼리 행동 통일이 되지 않고 십자군 지도자들과 교황 특사 펠라기우스 간의사이에 경쟁이 일어나면서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1225년 6월 24일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것이 확정되자 호노리오 3세는 이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2세 (예루살렘)|이사벨라 2세]] 여왕의 혼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1225년 7월 [[산 제르마노 조약]]은 2년의 유예기간을 허용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군 원정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호노리오 3세는 1227년 3월 18일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희망이 달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가 추진했던 사업은 후임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이어받았다.
== 생애 ==
연만하여 교황이 되었으므로 선임 교황의 정책을 답습하는 정도였고 교회 안의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가르멜회]]를 인가하였다.
 
거룩한 땅의 해방 외에도 호노리오 3세는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 이단 진압,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발트 해]] 연안을 대상으로 한 그리스도교 포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라틴 제국 유지 등 굵지한 현안들을 도맡았다.
[[1217년]] 호노리오 3세는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실시하였다. [[키프로스]]와 [[헝가리]]의 [[군주]]들은 [[아크레]]가 위협당하는 것을 알고는 [[1217년]] [[예루살렘]]에 상륙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예루살렘의 [[브리엔의 장|장]]은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하고 [[1218년]] 다미에타를 점령하였으나 [[카이로]] 공격이 실패로 끝나 결과적으로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 현안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신경 쓴 문제가 바로 이단의 뿌리를 뽑는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대한 인노첸시오 3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의 툴루즈 백작 레옹 6세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도 이 문제에 끌어들임으로써 인노첸시오 3세가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달성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아비뇽]]의 포위와 함락이다. 호노리오 3세와 프랑스의 [[루이 8세]]는 아비뇽에 대한 프리드리히 2세의 소유권 주장을 무시하였다.
 
==수도회 인가와 기타 활동==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도미니코회]]를 인가한 것을 시작으로,<ref>''Religiosam vitam'': A. Tommassetti,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aurinensis editio'' III (Turin 1858), p. 309-311 (December 22, 1216).</ref> 1223년에는 [[프란치스코회]]를,<ref>''Solet annuere'': A. Tommassetti,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aurinensis editio'' III (Turin 1858), p. 394-397 (November 29, 1223).</ref> 1226년에는 [[가르멜회]]를 인가하였다.<ref>''Ut vivendi'': A. Tommassetti,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aurinensis editio'' III (Turin 1858), p. 415-417 (January 30, 1226).</ref>
 
1219년 호노리오 3세는 [[도미니코]]와 그를 따르는 수도자들에게 로마의 [[산타 사비나 성당]]을 거처로 내주었으며, 그들은 1220년 초까지 이 성당에 머물렀다. 그 전에 수도자들 로마에 임시로 머문 거처는 [[산 시스토 베키오 수도원]]인데, 이곳은 1218년경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에게 내주었다. 도미니코의 지도 아래 이곳 수도원은 성소 희망자들을 모집하고 로마의 수녀들을 개혁하는 장소가 되었다. 산타 사비나 성당의 수도원 학교(studium conventuale)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의 도미니코회 대학교(studium generale)의 전신이 되었다.
 
1217년 호노리오 3세는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세르비아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호노리오 3세의 치세에 많은 제3회가 세워졌다. 그는 1221년 교황 칙서 《생활 지침》(Memoriale propositi)을 내려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인가하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전임 교수 네 명이 세운 발 데 에콜리에르 연합회를 인가하였다.
 
해박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호노리오 3세는 성직자들이 특히 신학 분야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