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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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오는 이야기 ==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일연의 《[[삼국유사]]》2권 무왕조(武王條)에는에 따르면 서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왕후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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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의 왕비는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이며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역사적 사실로서의 진위는 논란이 되고 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武康王)과 관련 짓고 있다. 하지만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선화공주 서동요와 익산 미륵사 건립 논란 ==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전라도 익산의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면서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백제 대귀족)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ref>{{뉴스 인용|저자1=민송기|제목=[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서동요와 괴담|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3694&yy=2015|날짜=2015-06-15|확인날짜=2017-08-24|뉴스=매일신문}}</ref> 그러나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당대 백제의 왕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반론을 펼치고 있다.
 
== 서동요를 소재로 하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