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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915년]] [[12월 12일]] ~ [[1916년]] [[3월 22일]]
|별칭 = [[자 (이름)|자(字)]]는 위정(慰庭) <br /> [[호 (이름)|호(號)]]는 용암(容庵)
|사망원인 = [[요독증]]
|배우자 = 본부인 위씨(于氏) <br /> 첩실 선씨(沈氏) <br /> 첩실 진씨(金氏, 조선인, 안동 김씨 조선 척족) <br /> 첩실 리씨(李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br /> 첩실 우씨(吳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br /> 첩실 양씨(楊氏) <br /> 첩실 예씨(葉氏) <br /> 첩실 장씨(張氏) <br /> 첩실 궈씨(郭氏) <br /> 첩실 류씨(劉氏)
|자녀 = 슬하 17남 15녀
|지휘 =
|배우자 = 본부인 위씨(于氏) <br /> 첩실 선씨(沈氏) <br /> 첩실 진씨(金氏, 조선인, 안동 김씨 조선 척족) <br /> 첩실 리씨(李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br /> 첩실 우씨(吳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br /> 첩실 양씨(楊氏) <br /> 첩실 예씨(葉氏) <br /> 첩실 장씨(張氏) <br /> 첩실 궈씨(郭氏) <br /> 첩실 류씨(劉氏)
|자녀 = 슬하 17남 15녀
|부모 = 위안바오칭(양부) <br/> 위안바오중(생부)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청일 전쟁]]
 
== 군벌 ==
위안스카이는 [[군벌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군벌로 잘 알려져 있는데, 후일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을 창설했다.
그는 실제로는 군벌이 아니다. 그가 창설한 북양군은 청나라의 정규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군을 강하게 사병화하고 군대 내에 심복을 두는데,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들 심복들이 본격적인 군벌이 된다.
 
* [[1898년]]: [[무술변법]]에서 개혁파 동지들을 배신, [[서태후]]의 신임을 얻음.
* [[1899년]]: 공부 우시랑(工部 右侍郞) 산동 순무(山東 巡撫) 서리로 승진. 신형 무기와 훈련으로 무장한 무위군(武衛軍)을 동원하며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고, 이 일은 그가 능력 있는 장군으로 인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01년]]: 직례 총독(直隷 總督)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됨.
* [[1902년]]: 허베이성 바오딩(保定)에서 북양상비군(이후 북양군) 편성.
* [[1905년]]: 북양군을 북양육진(北洋六鎭)으로 확대 편성. 그 중 하나는 만주족 귀족인 철량(鐵良)의 부대였지만, 다른 5진은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 [[1906년]]: 모든 군무에서 사임하도록 종용을 받음. 북양군에 대한 병권을 육군부로 넘겨주었다.
* [[1907년]]: 북경에서 근무하면서 군기대신(軍機大臣)과 외무부 상서(尙書: 외무부 장관)를 겸직.
* [[1909년]]: 만주족 섭정왕(攝政王) 재풍(載沣)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됨. 일시 귀향.
* [[1911년]]: 우창에서 봉기 발생.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진압군으로서 호북의 육군과 해군의 군권 장악.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그러나, 북양군을 이끌고 한커우(漢口)점령. 이어서 베이징으로 진격,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
** [[쑨원]](孫文)과 막후 협약. 쑨원의 혁명당은 황제 퇴위와 공화정 체제를 요구.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정부의 [[중화민국의 총통|대총통]]으로 선출된다는 조건을 내 놓음. 위안스카이는 혁명당의 이름을 빌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킴.
* [[1913년]]: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중국 국민당]] 및 국회 해산.
* [[1914년]]: 임시약법(臨時約法) 폐기. 국무원 해산. 북양군 [[단기서]] 등의 군권 박탈. 임시약법의 폐지로 봉건독재적 대총통 권력을 가지게 됨.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 발발하자 [[영일 동맹|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일본은 중국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1915년 1월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21개조 요구]]조건을 위안스카이 정부에 제시했다. 일본은 1915년 5월 7일 위안스카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발하였으며, 위안스카이 정부는 5월 9일 이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ref>백범흠《중국:외교관의 눈으로 보다》늘품플러스(2010) 411쪽 ISBN 978-89-93324-15-0</ref> (→[[21개조 요구]]·[[일본-중국 관계]])이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 [[1915년]] 12월: [[참정원]]을 조정하여 [[중화제국]] 대황제로 칭제('''홍헌제'''; 洪憲帝). [[중화민국]]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제국으로 바꿈. 이에 윈난, 구이저우, 광시 및 광둥 저장 산시(陝西) 후난 쓰촨 등의 지방군이 봉기하고, 중국의 일반 시민은 물론,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북양군의 일부 계파를 포함한 내외적인 반격과 반발을 받음.
* [[1916년]]
** [[3월 22일]]: [[군주제]]를 취소하고 중화민국의 연호를 회복함. 이것인즉 사실상 위안스카이 본인이 중화제국 군주 정부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당의 항거를 견디지 못하고 끝끝내 보위에서 쫓겨나고 만 실태인데 보위에서 퇴위한 위안스카이는 부연 추가적인 유화책으로, [[돤치루이]]를 다시 기용하고 위안스카이 본인은 다시 중화민국 대총통의 위치로 돌아가기를 희망함. 그러나 봉기가 일어난 지방 각 성의 군벌과 민중은 그를 성토하며, 지방 성의 군벌들은 관계 단절 혹은 독립을 선포함.
* 손자며느리: [[우젠슝]](吳健雄, [[1912년]] [[5월 3일]] ~ [[1997년]] [[2월 16일]], [[중화민국]] 태생의 [[미국]] 여성 [[물리학|물리학자]]. [[자연과학|이학]][[박사]]. 영문 이름은Chien-Shiung Wu. 前 [[미국물리학회]] 회장. [[1955년]] [[미국]] [[미국 시민권|시민권]] 취득.)
 
* 위안스카이는 총 1명의 정실 부인과 11명의 첩실을 두었다.
이 중 3명이 그가 [[1882년]] 23살때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왔다가 맞아들인 여인들이다. 일설에는 [[대한제국]] [[조선]]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그에게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가운데 첫 번째 첩실로 맞아들인 조선 여인은 안동 김씨로 알려졌다. 그녀는 [[1889년]]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인 [[위안커원]](袁克文, [[1889년]] ~ [[1931년]]) 낳은 후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 후 안동 김씨의 두 조선인 몸종인 이씨와 오씨도 첩으로 맞아들였다. 이들 조선인 첩이 낳은 위안스카이의 자녀는 총 15명(7남 8녀)를 얻었으며, 그의 자녀 17남 15녀(32남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위안커원의 경우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이후에 후계자로써도 거론되었다.
 
첩실 장씨(張氏), [[허난 성]] [[정저우 시|정저우]] 출신 - 소생 없음
 
첩실 곽씨(郭氏), [[장쑤 성]] [[쑤저우 시|쑤저우]] 출신의 기녀 - 소생 없음 <br />
열세 번째 아들 - 원극상(袁克相)<br />
열다섯 번째 아들 - 원극화(袁克和)<br />
{{각주}}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97080 '샐러리맨 신화' 원세개, 왜 파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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