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엄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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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엄씨'''(貴人 嚴氏, [[생년 미상]] ~ [[1504년]] [[음력 3월 20일]])는 [[조선 성종]]의 [[후궁]]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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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영월 엄씨|영월]]이며, 본명은 은소사(銀召史), 또는 은소이(銀召伊)이다. 엄산수(嚴山壽)의 딸로 태어났다. [[조선왕조실록|실록]]의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7일]]에, '엄씨의 맏누이 김소사(金召史)는 단계부정(丹溪副正)의 아내가 되었고...서누이 말금(末今)은...' 라는 기록이 있다. 그녀의 언니가 왕족의 아내<ref>'부정(副正)'은 왕족에게 붙는 호칭이다.</ref>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엄씨도 양반가의 출신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엄씨의 서자매를 따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 엄씨는 양반가의 적출(嫡出)일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품계|정3품]] [[내명부|소용]](昭容)이었으며,<ref>《연려실기술》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祖故事本末)</ref> 후에 종2품 숙의(淑儀)에<ref>《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1527) 3월 24일 3번째기사</ref>, 이어 종1품 귀인(貴人)에 진봉되었다<ref name="gi">《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 6월 1일 2번째기사</ref>.
 
그녀는 성종의 또다른 후궁인 [[귀인 정씨 (성종)|귀인 정씨]]와 함께, [[폐비 윤씨|중전 윤씨]]를 모함하여 폐출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궁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그녀와 정씨를 극도로 미워하였다. 결국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창경궁]] 뒷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시켜놓고 몽둥이로 때려서 살해하였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시체는 모두 찢겨 젓갈로 만들어졌고, 연산군은 그것을 아무데나 뿌려버리도록 지시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연산 10년(1504) 3월 20일 5번째 기사</ref>.
 
또한 엄씨의 가족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녀의 유일한 소생인 [[공신옹주]](恭愼翁主)는 폐서인이 된 후 유배되었다. 그러나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 등은 모두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복위되었으며,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내어 그 절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ref name="gi"></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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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외부 연결링크 ==
*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