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되시 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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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태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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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에르되시는 헝가리의 [[반유대주의]]를 피하여 영국 [[맨체스터]]로 망명하였다. (에르되시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홀로코스트]] 동안 처형당했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종신 재직권을 수여받지 못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그의 삶을 특징짓는 떠돌이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에르되시는 대한 기록은 그가 순진하고, 아이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일례로, [[1941년]] 그는 다른 수학자와 열띤 토론을 하다가, [[미국]] [[롱아일랜드]]의 군사 통신 시설을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들은 스파이 혐의로 붙잡히고, 이 사건은 [[연방수사국]]의 기록 파일에 올려졌다. 또한, 에르되시는 명성과 천재성으로 어느 대학에서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누구든지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를 가지고 온 수학자라면 함께 논문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의 1500개의 공동 논문을 썼고, 지금까지의 역사상 가장 공동연구를 많이 한 수학자가 될 것이다되었다. 그와 공동연구를 했던 수학자들은 [[에르되시 수]]란 말까지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이 에르되시는 혼자서는 논문을 거의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수학을 ‘사회적 활동’으로 만든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에르되시는 죽음을 표현할 때 "떠난다"는 말을 썼고 "죽는다"란 말은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아이들을 [[엡실론]](epsilon, [[수론]]에서 [[무한소]]를 의미함)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