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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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 대구 10·1 사건
|전체 = [[한국의 군정기]]
|그림 =
|그림크기 = 300px
|설명 =
|날짜 = [[1946년]] [[10월 1일]] ~ [[1946년]] 11월
|장소 = 남한 내 미국 군정 치하 전체 지역.
|결과 = 소요 진압, [[박헌영]] 월북.
|군대1 = {{국기그림|미국|1912}}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br /> {{국기그림|한국}} [[한국 경찰]]<br />[[독립촉성국민회|독촉]]<br />[[서북청년단|서청]]
|군대2 = [[File:Flag of the Communist Party of Vietnam.svg|22px]]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br /> {{국기그림|한국|남조선로동당}} [[조선공산당]]<br />기타 시위 군중
|지휘관1 =
|지휘관2 =
|병력1 =
|병력2 =
|사상자1 = 경찰 38명<br />공무원 163명
|사상자2 = 민간인 73명
|지도 =
|지도설명 =
|기타 = 위 피해자 수치는 신고된 사람에 한한 것이기에 실제 피해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크다.
}}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운동을 지칭한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 10월 인민항쟁, 10월 항쟁, 10·1사건, 영남 소요, 10월 폭동 등으로 불린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10월 인민항쟁, 10월 항쟁으로,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영남 소요, 10월 폭동으로 부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10·1사태로 부른다. 자생적인 민중 항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10월 항쟁으로, [[조선공산당]]의 선동 및 주도를 주장하는 시각에서는 10월 폭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10월 폭동, 영남 소요, 10월 항쟁의 용어가 혼용되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민중 항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여 10월 항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며, 공식적으로는 보다 중립적인 10·1사건이라는 지칭을 사용한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knun.net/news/article.html?no=5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