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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림제목= 정운 영정
|출생일= [[1543년]]
|출생지= 해남 옥천면 대산리
|사망지= 부산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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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국적= [[조선]]
|별명=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
|학력= 1570년 무과
|직업= 무신,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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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ref>{{웹 인용|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b_12505001_020&grp=&aid=&sid=252403&pos=0|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확인일자 = 2009-2-14|저자 = |날짜 = 1592-5-1|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26권}}</ref>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ref>{{웹 인용|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001023_001&grp=&aid=&sid=252402&pos=4|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확인일자 = 2009-2-14
|저자 = |날짜 = 1597-1-23|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84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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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적 ==
* 《정충장공실기》(鄭忠壯公實記)
:녹도만호 정운의 실기로 2권 2책의 목판활자인쇄본이다. 8대손 정희(鄭熺)가 1866년(고종 3)에 편찬, 간행하였다. 2권에 수록된 <명원소(鳴寃疏)>는 정운의 아들 정지언(鄭之彦)이 올린 상소로‚ 부친이 전장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은데도 녹훈의 대상에서 누락되었음을 원통히 여겨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저자미상의 《변백사제장사론》(辨白沙諸將士論)에서 영남이 위태로웠을 때 이순신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사람이 순천부사 권준과 광양현감 어영담이었다는 백사(白沙, 이항복)의 말을 반박하는 내용의 글이다. 이 글에서는 그 공은 녹도만호 정운과 공군관 송희립의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권준은 오히려 관곡을 빼돌리려 하다가 들킨 인물로 남의 공을 가로챘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ref>https://kjg.snu.ac.kr/HEJ/HEJ_LANGVIEW.jsp?setid=54668&pos=0&type=HEJ&ptype=list&subtype=am&lclass=al&ntype=al&cn=GK04645_00{{깨진 링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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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바깥외부 링크 ==
* [http://goheung.go.kr/g_board/board_read.jsp?id=sp_tour&num=674&nnum=0&category=ae 고흥 쌍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