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바깥 고리 → 외부 링크)
1번째 줄:
{{인물 정보
|이름 = 김덕령
|출생일= [[1567년]]
|출생지= [[조선]] [[전라도]] [[광산군|광주군]] 광주읍(현 광주광역시)
|사망지= [[조선]] [[한성부]]
20번째 줄:
}}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는 경수(景樹),<ref>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67_1_000142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김덕령] </ref>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지도자로 호남 의병장인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진주에서 전멸한 뒤 다시 광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병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전선이 교착상태에 들어선 뒤 의병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그러던 와중 [[이몽학의 난]] 관련자로 무고되어 처형당한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50번째 줄: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s:춘산에 불이 나니|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ref>김영헌, 김덕령 평전 -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광주 (북구 일곡동) : 향지사, 2006년.</ref>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132번째 줄:
* 호남인물100, 광주 : Ehd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429 김덕령:네이트 한국학]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8410.html 질투의 화신 선조는 못 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