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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溫祚王, ? ~ [[28년]], <small>재위:</small>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은 [[백제]]의 건국자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다. 형으로는 [[유리명왕]]와 [[미추홀]]의 창업자 [[비류]]가 있다.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 소생 [[유리명왕]]이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위례성]]에 자리잡고 [[백제]]를 건국하였다. [[일본]]에서는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이라 부른다. [[음태귀수왕|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여러 내용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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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 설화]]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상기한 [[시조 온조설]]에 입각해 있으나,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비류설]]과 [[시조 구태설]] 등 다른 설도 있다.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동부여]]에서 유리가 생모 예씨부인을 데리고 남하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형제를 데리고 남하했다. [[기원전 18년]] 형 비류는 인천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미추홀이라 하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라 했다가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자 백제라 하였다.
 
[[기원전 17년]] 음력 3월 족부(族父: 왕의 7촌 종숙) [[을음]](乙音)을 [[우보 (관직)|우보]]로 삼았다.
 
[[기원전 16년]] 음력 9월에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15년]]에는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0일만에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자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서기 [[4년]] 음력 8월에는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았고, [[6년]] 음력 7월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다. 하지만 [[마한]]의 압력으로 목책을 철거했다.
 
[[7년]] 음력 2월에는 왕궁의 우물이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고 몸이 2개였다. 온조왕은 그것이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 음력 2월에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ref>전주</ref>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노령이남의 전남지역은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ref>《[[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은 [[9년]]에 [[마한]]을 정복하고 [[백제]]의 판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이전의 정설에 의하면 실제로 마한을 복속시킨 것은 [[백제 고이왕|고이왕]] 때로 그때까지 작은 마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축성연대는 대략 BC 1세기 이후로 추정되어 [[백제]]국이 소국이었다는 시대와 맞아떨어지는데 각 성의 축성 규모나 사용된 기술력 등은 고작 인구 만 명 안팎의 부족국가가 감당하기는 불가능하고 웬만한 규모의 영토와 상응하는 주민을 보유하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진 국가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가령 [[백제]], [[신라]]의 초기 내용들은 대체로 정확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 한참 뒤까지 마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후에 새로 정복한 영역을 포섭할 요량으로 대외적으로 한동안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소국체제를 일단 지방 행정체제로 유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ref>
 
=== 생애 후반 ===
서기 [[9년]] 음력 7월에는 [[대두산성]]을 쌓았고, 서기 [[10년]] 음력 2월에는 왕자 다루를 태자로 삼아 군정을 맡겼다.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18년]]에 [[백제]]는 [[온양군|탕정성]]<ref>아산시 온양동</ref>, [[고사부리성]]<ref>정읍 고부</ref>을 쌓았고 [[전주시|원산성]]과 [[금현성]]<ref>충남 연기군 전의면</ref>을 수리했다. [[22년]] 음력 9월과 11월에는 말갈이 [[술천성]]<ref>여주군 금사면</ref>, [[부현성]]<ref>강원도 평강</ref>을 습격하였지만 간신히 적을 퇴치했다.
 
온조왕은 [[28년]] 음력 2월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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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 평제|한 평제]] ([[기원전 1년]]~[[6년]])
** [[유자영]] ([[6년]]~[[8년]])
*[[신]]
** [[왕망]] ([[8년]]~[[23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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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930&path=|183|193|&leafId=223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온조왕]
* [http://keyword.pressian.com/articleK.asp?guide_idx=5974 백제를 건국한 사람은 누구일까?] 프레시안 2010.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