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북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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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후연 2대 황제 혜민제(惠閔帝) [[모용보]](慕容寶, 재위 : [[396년]] ~ [[397년]])가 [[태자]]로 있었을 때, 고운은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보]]가 등극한 후 시어랑(侍御郞)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물러났다.
그는 [[397년]],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 공으로 인해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는 한편 [[모용씨]]를 하사받았는데, 이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북연]]의 두 번째 황제가 되는 [[풍발]](馮跋)과 두터운 친교를 쌓게 된다.
후연 4대 황제 소문제(昭文帝) [[모용희]](慕容熙, 재위 : [[401년]] ~ [[407년]])는 성격이 광폭한 폭군이었다. [[407년]] 황후인 [[부황후 (후연)|부씨]](苻氏)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풍발]]은 고운을 추대할 거사계획을 알리고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다.
고운은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풍발]]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은 후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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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
고운은 음력 4월에 황제로 즉위하였고 자신의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씨로 되돌렸다. 스스로를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으나 오늘날은 [[모용씨]]가 지배하던 시기와 구분하여 [[모용희]]가 지배하던 때까지를 [[후연]](後燕), 고운의 등극 이후를 [[북연]](北燕)으로 구분하고 있다.<ref> 고운을 후연의 마지막 황제로 보고 [[풍발]]이 등극한 시기를 [[북연]]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여기서는 《[[삼국사기]]》에서 [[북연]]이라 부른 것을 따랐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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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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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0470&isEQ=tru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
{{틀:오호 십육국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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