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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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군주 ===
그가 정식 독일의 군주로 즉위한 것은 [[919년]] [[5월 6일]]이었다. 그 날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인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를 선출한 제후들은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형식적으로 선출할 때 선제후들이 참여하도록 정착되었다. 이어 후대에 가서 선제후에 보헤미아 공작 등이 추가되었다. 이때 [[볼테르]]에 의하면 그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손에 올라온 [[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새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는 [[카롤링거 왕조]]의 일가는 아니었고, 단지 그의 누나가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소 루트비히]]의 왕비였던 적이 있었다. 즉위 전 일부 귀족들로부터 [[마인츠]]의 [[대주교]]로부터 세례, 기름부음 의식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지만 하인리히는 이것을 가치없는 짓이라며 거절했다.<ref>그에 따라 당시 프랑크 족의 사회에서 그는 처음으로 세례 의식을 받지 않고 사람들의 천거로 즉위한 유일한 왕이 되었다.</ref> 그는 내 조상과 신들 앞에 나는 왕이라고 그렇게 임명될 것으로 예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프리츨라어]]에서 소집된 회의에서는 작센과 프랑켄의 귀족들만이 절대 찬성했으므로, 그는 다른 지역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특히 나쁜 공작 또는 악마 공작이라는 별명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와는 [[92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 중 [[라티스본]]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거절했다.
 
[[919년]] 일부 귀족들은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921년 바이에른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아르눌프]]는 자치권과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권리를 추가로 요구했고, 하인리히 1세는 이를 승인함으로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슈바벤]]의 [[부크하르트 2세]]도 하인리히 1세에게 일단 충성을 맹세했지만 계속 반발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계속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하려고 암암리에 시도하였다. [[부크하르트 2세]]가 죽자 하인리히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에 임명한다.
 
귀족들과의 불화는 그의 즉위의 정당성 및 왕국의 안정에 위협적이었고, [[마자르 족]]의 잇단 침략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920년대 내내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슈바벤]]의 [[부크하르트 2세]]도 하인리히 1세에게 일단 충성을 맹세했지만 계속 반발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계속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하려고 암암리에 시도하였다. [[부크하르트 2세]]가 죽자 하인리히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에 임명한다.
 
그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동프랑크 왕국은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콘라트 1세]]가 아들이 없어서 결국 동프랑크의 강력한 귀족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지만 슈바벤,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그에게 반발했고, 한동안 무정부상태였다. 그는 [[바이에른]] 등 일부 지역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재위기간 내내 불안정했다. 즉위 직후 [[바이에른 공국]]과 전쟁을 벌였고, 하인리히는 자신이 주교를 임명할 능력이 있는 것을 들어 우위를 선점하려 했다. 바이에른 공작의 일부 권한을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료시켰지만 끝내 바이에른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무력으로 [[바이에른]]을 점령하였다.
 
하인리히는 통치권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미약했고, 그는 스스로도 왕국을 왕국이 아닌 공국과 제후들의 연맹체 또는 연합체 정도로 인식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후임자들이 시도한 것처럼, [[샤를마뉴 대제]]처럼 관료를 파견하여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고 제국을 관리하려 하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바이에른 공국]] 등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승인하였다.
 
=== 이민족과의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