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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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년]]부터 [[로트링겐]]을 공략하여 928년 [[줄피히]](Zülpich)에서 로트링겐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트링겐을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대신 그는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에게 대신 자신의 가신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로트링겐 공작 직위를 주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대신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주어 반발을 무마시켰다.<ref>게르베르가는 기셀베르트 사후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재혼한다.</ref> 하인리히는 910년 이후 잃어버린 다섯번째 영역을 다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928년 아들 [[하인리히 1세 (바이에른)|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마자르]]와 [[보헤미안]], [[모라비아]], [[바이킹]] 등이 동프랑크 왕국을 수시로 유린하는 가운데,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마이센]], [[슐레스비히]], [[고타]], [[헤르포드]], [[고슬라]], [[퀘들린부르크]] 등 [[작센]] 지역도 이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의 측근, 봉신들은 그에게 군사 및 민병대를민병대, 군량 등을 제공하여 [[작센]] 지역에 침입한 이민족들을 몰아냈다. 그는 측근, 봉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도시 헌장이라는 일종의 규약을 제시하였다.
 
==== 2차 마자르 공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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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그는 자신의 사후 아들 [[오토 1세]]에게 자연스러운 승계를 위해 공동 국왕으로 선포했다. 아들 [[오토 1세]]는 아버지의 영향력에 의해 바로 독일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미 즉위한 상태에서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마인츠]] 대주교의 집전 하에 즉위식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오토는 로트링겐, 슈바벤, 프랑켄 공작을 자신의 수행원 역할을 하게 한다. 하인리히는 [[들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하인리히는 [[들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1848년]] [[독일]]의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요한]]을 비롯한 범독일주의자, 대독일주의자들은 그에게 독일의 모든 부족의 첫 실질적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로헨그린(1850년작)에서 하인리히 1세를 캐릭터로 등장시켜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