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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 [[서프랑크]]의 왕 [[샤를 3세|샤를 르 생쁠]]이 군사를 이끌고 [[보름스]] 근처 [[페더르스하임]]( Pfeddersheim)까지 쳐들어왔지만 하인리히 1세가 미리 군사를 준비해둔 것을 알고 퇴각하였다.
 
하인리히 1세는 [[911년]] [[11월 7일]] 동프랑크를 대표해 [[서프랑크]]의 왕 [[샤를 3세|샤를 르 생쁠]]과 만나 동맹,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샤를 3세|샤를 르 생쁠]]은 이를 어기고 [[로타링기아]](로렌)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한편 하인리히 1세는 [[샤를 3세|샤를 르 생쁠]]이 [[로베르 1세]]에게 축출당하자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기회를 봤다가 [[923년]] 말, 하인리히는 두 번 [[라인 강]]을 건너 로타링기아로 들어갔고, [[924년]] [[10월]]까지 로타링기아의 동부 지역은 하인리히의 영향력하에 남게 되었다.
 
==== 마자르 족 ====
912년부터 [[마자르 족]]은 계속 [[동프랑크]]를 침략해왔고 919년 즉위 직후에 [[마자르 족]]이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런데 이때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1세는2세는 하인리히를 도와주는 것을 거절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내심 하인리히를 왕이 아닌 단지 공작 정도로 취급하였다. 하인리히는 부르크하르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대신 헤르만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921년 [[마자르 족]]이 왕국의 동부와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마자르 족]]의 상당한 병력에 대부분의 도시, 제후들은 패배했지만 일부 지역인 [[바이에른]]의 [[카란티아 후작령]]에서 에버하르트와 메란 백작(Count of Meran) 등은 [[마자르 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924년 동남부에 있던 [[마자르 족]]이 독일 영토를 침략하자 하인리히는 일단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겠다 약속하여 되돌려보냈다. 동시에 이전에 포로로 생포했던 마자르 장군들을 넘겨주었다. 동시에 하인리히는 국내에 성곽을 쌓아 도시들을 요새화시키고, 기병대 양성 및 기병대에 대한 훈련을 강화하였다.
 
==== 로렌로타링기아 공략 ====
[[925년]]부터 [[로트링겐]]을 공략하여 928년 [[줄피히]](Zülpich)에서 로트링겐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트링겐을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대신 그는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에게 대신 자신의 가신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로트링겐 공작 직위를 주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대신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주어 반발을 무마시켰다.<ref>게르베르가는 기셀베르트 사후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재혼한다.</ref> 하인리히는 910년 이후 잃어버린 다섯번째 영역을 다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928년 아들 [[하인리히 1세 (바이에른)|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마자르 족]]과의 휴전을 얻어낸 직후 동쪽 국경 지대에 있던 [[슬라브 족]]이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슬라브 족의 하나인 폴라비안 슬라브 족(Polabian Slavs)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928년]] 겨울 [[슬라브]]계의 다른 부족인 헤벨리(Hevelli) 족이 차지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였다. 이후 골로마츠(Glomacze) 땅과 [[엘베 강]]변까지 점령하고 슬라브 부족을 몰아냈고, 알브레히츠부르크와 마이센 성을 점령하였다.
 
[[928년]] 그는 브란덴부르크의[[폴란드]] [[브란덴부르크]]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인 헤벨리족과 마이센의 달레민치족을 정복하고 독일에 복속시켰다. [[928년]] 겨울, [[슬라브 족]]이 [[독일]] 영역을 넘어와다시 [[브란덴부르크]]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엘베강 중류에 있는 [글로마츠]]까지 침공하여 성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작센 족]] 역사학자 비두킨트에 의하면 이때 하인리히는 위기에 직면했다 한다. 동시에 [[보헤미아]]에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단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등의 지원으로 퇴각하여 [[929년]] [[프라하]]를 공략, [[보헤미아의 벤첼 1세]]를 굴복시키고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받았다. 그해 9월 28일 [[보헤미아의 벤첼 1세]]는 죽고, 벤첼이 죽자 바로 그의 형제 보로슬라프가 보헤미아족의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 하인리히는 보로슬라프를 강제로 끌고 가 950년 여름까지 독일 군에 복무하게 했다.
 
929년 슬라브계 부족인 레다리 족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살해하고 새 지도자를 선출한 뒤, 작센 안할트의 발스리빈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백작 베른하르트와 테이마르(Thietmar)와 군사를 보내 레다리 족과 싸워 929년 9월 4일 레젠렌젠 요새에서 고전 끝에 슬라브 족을 최종 격파했다. [[슬라브 족]]을 최종적으로 격퇴한 뒤 하인리히는 슬라브 족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슬라브 족은 이교도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거절한다.
 
한편 [[슬라브족]]의 침공에 대해 그는 932년과 934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엘베 강]]을 건너 [[슬라브 족]]의 본거지인 동부지역 영토 밖을 진격하여 슬라브족들을 격파하고 영토에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는 영토 밖 동부지역의 이민족인 슬라브인, 마자르인의 침략과 북방의 데인족의 침입을 모두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다른 제후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슬라브계 부족과 전쟁 중이던 928년부터 하인리히는 사자를 보내 마이센에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 리아드 전투에서의 승리 ===
 
=== 생애 후반 ===
934년에는 [[데인 족]]의 공격을 받아 직접 출정하였다. [[데인 족]]은 바다 건너 [[프리슬란트]]의 해안가를 약탈했다. [[데인 족]]은 이어 [[밴드 족]]과 연합해 하인리히의 작센 영지까지 공격했다. 같은 해인 943년 하인리히는 [[덴마크]]를 침공, [[덴마크 왕]] [[크누트 1세]]와 교전하였고, [[슐레스비히]]에서 데인 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슐레스비히를 독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동시에 그는 덴마크 족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받고 되돌아왔다. 이어 [[밴드 족]]의 영토까지 쳐들어갔다.
 
그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는 한편 독일 내 후작급 반대파 귀족들을 설득했다. 하인리히는 독일을 국가라기보다 여러 부족 공작, 제후들의 연맹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은 포기하고 종주권을 획득하는 선에서 그쳤다. 프랑켄 지역을 복속시키면서도 자치권을 인정하고 명목상의 권리만 행사했을 뿐이고, [[슈바벤]]과 [[바이에른]]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했고, 그는 919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켰지만 부르하르트에게 통치권과 민사행정권을 허락하고 종주권만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