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겐키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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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키치는 [[일본]] [[오사카 부]] 출신으로, 육군 군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인이 된 후에는 육군의 두 사단, 일본 군무국, 참모 본부를 거쳐, [[시베리아 출병]]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가 되었다.
 
이후 교육 총감부와 기병 연대를 거쳐 [[1923년]] [[8월]]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28년]] [[8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맡은 후에는 제9사단장으로서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이 던진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그 뒤에는 참모 본부에서 일했고,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군사 참의관을 맡은 후에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고, 재임 중에 일어난 [[할힌골 전투]]의 발발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1939년]] [[12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향우연맹 회장을 맡았고 [[1962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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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당시,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된 제23사단 담당구역에서 처음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력한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관동군 최고의 정예부대인 제7사단을 파견하자는 부하의 상신에 대해, 만약 자신의 담당구역에 벌어진 사건을 다른 사단에 맡긴다면 자신은 [[할복]]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흥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동군 사령관인 우에다의 주도로 약체의 제23사단이 소련군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참패했고, 자신도 이에 책임을 지고 예편처분 되었다.
 
== 바깥외부 고리링크 ==
* [http://www.generals.dk/general/Ueda/Kenkichi/Japan.html 우에다 겐키치의 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