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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산시 성 (섬서성)|섬서]] [[상뤄 시|상저우]]로 철수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이 계속 패퇴하자 많은 명의 유신(遺臣)이 [[난징|남경]]에서 세운 [[남명]]이나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청에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샹양 시|양양]]을 거쳐 [[후베이 성|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도중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서 그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는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소멸되었다.
 
=== 이자성의 난 ===
==== 반란 발생 ====
그때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청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천민 출신이었던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는 군대를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다. 끝내 이자성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뤄양 시|뤄양]]을 함락시키고 [[카이펑 시|카이펑]]과 [[시안 시|시안]]을 점령했으며, [[베이징 시|베이징]]으로 진격하였다.
 
==== 명나라의 멸망 ====
승승장구의 기세로 북경에 들이닥친 이자성의 반군을 막을 수 없었던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결국 황후와 딸을 죽이고 메이산 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이로부터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로써 명나라는 277년이라는 역사가 끝이 났다.
 
==== 오삼계의 공격 ====
그때 후금군은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과 가족들을 붙잡고, 휘하의 장수인 유종민이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취하자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후금에 투항했다. 후금군은 오삼계의 길잡이를 도움받아 북경으로 진격해 이자성의 난을 진압한다. [[오삼계]]의 공격 작전이 전개된지 불과 40일만에 [[리훙지|이자성]]은 [[순나라]] [[황제]] 보위에서 폐위 축출되었다.
 
== 최후말년 ==
[[우창 (후베이 성)|우창]]과 [[장시 성|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현재 호북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지만, 구궁산(九宮山)에서 명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 세력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실제 사정은,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자성은 자결하였다. 이자성이 사망하고 나서 대순의 농민군은 사망한 이자성을 위해서 구궁산 일대를 소탕하여 보복하고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계속 대항한 일변, 이자성 사망 후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자성이 탈출하여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후난 성]] [[창더 시|창더]]인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제설이 아직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