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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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제2차 리옹 공의회}}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소위 ‘피의 비방’ 소문과 그로 인한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는 서신을 썼다.<ref>[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g10-jews.html]. Brian Tierney, ''The Middle Ages: Sources of Medieval History'' sixth edition, revised, Vol 1 (New York: McGraw-Hill 1999), 259-260.</ref> 그리고 교황 선거 과정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비테르보의 콘클라베에서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교황 선거를 위해 외부와 차단된 곳)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하고, 다시 5일이 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빵과 포도주와 물만 제공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담은 교황 선거법을 제정한다는 [[교황 칙서]]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발표하였으며, 이는 1274년 7월 16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비준되어 교회법전 조항에 포함되었다.
 
1272년 로마에 당도하고나서 그의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전임자 그레고리오 9세의 뜻을 이어받아 공의회 소집에 착수한 것이었다. 교황으로 즉위한 지 이틀 후에 그레고리오 10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1274년 5월 1일 개최될 공의회에 초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ref>Thomas Rymer ''Foedera, Conventiones, Literae et cuiusque generis Acta Publica inter Reges Angliae et alios...'' editio tertia, Tomus I. pars 2 (The Hague 1745), pp. 121-122. 유럽의 다른 왕들과 제후들, 통치자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ref>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6월 5일 오르비에토를 떠나 1273년 11월 중엽에 리옹에 도착하였다.<ref>Augustus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671, 1672.</ref>
 
교황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적인 일에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럽]]의 여러 문제들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계 점령지들에 대해 소상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성지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부흥과 기독교 일치 회복 및 유럽의 정치적 질서 회복에 많은 괌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로잔의 [[합스부르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