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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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258년 하인리히는 주교로 축성되었으며, 스타불로의 유명한 수도원의 아빠스로도 선출되었다.<ref>''Gallia christiana'' III (Paris 1725), 939-952, at 948-949. 그는
나중에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주교직을주교직에서 사임하였다파면당했다.</ref> 하지만 성직자가 된 이후에도 하인리히는 과거 군인 시절의 방종했던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다. 1262년 그는 수석부제인 테오발도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의전참사회의 중에 그는 테오발도로부터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테오발도는 하인리히가 콘라디 드 코엥 르 프리종의 딸 베르타를 강압적으로 취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하인리히는 테오발도를 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며칠 후에 테오발도는 리에주를 떠나 거룩한 땅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고 전해진다.<ref>''Gallia christiana'' III (Paris 1725), 888-889. Alphonsus Ciaconius, ''Vitae et Res Gestae Pontificum Romanorum et S.R.E. Cardinalium (ab Augusto Olduino recognitae)'' Tomus II (Roma 1677), 185&#8212;하인리히가 실제로 테오발도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ref> 하지만 파리까지 간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계획했던 신학 공부를 재개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루이 9세 왕의 벗이 되었다.<ref>"Vita Gregorii X Papae," ab antiquissimo anonymo auctore scripta, in Ludovico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Tomus tertius (Mediolani 1733), p. 600. Campi, p. 223.</ref>
 
1267년 리에주를 떠나 파리로 간 테오발도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명령으로 1265년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잉글랜드로 간 [[교황 하드리아노 5세|오토보노 프레스키]] 추기경을 보좌하게 되었다. 프레스키 추기경이 띤 임무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끈 남작들의 반란에 부딪힌 헨리 3세 국왕을 돕는 것이었다.<ref>Francis Gasquet, ''Henry the Third and the English Church'' (London 1905), pp. 403-416.</ref> 테오발도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1세]])의 벗이 되어 그와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레스키 추기경은 비테르보로 돌아와서 1268년-1271년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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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소위 ‘피의 비방’ 소문과 그로 인한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는 서신을 썼다.<ref>[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g10-jews.html]. Brian Tierney, ''The Middle Ages: Sources of Medieval History'' sixth edition, revised, Vol 1 (New York: McGraw-Hill 1999), 259-260.</ref> 그리고 교황 선거 과정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비테르보의 콘클라베에서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엄격한 콘클라베 규정을 담은 교황 선거법을 제정한다는 [[교황 칙서]]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발표하였으며, 이는 1274년 7월 16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비준되어 교회법전 조항에 포함되었다.
 
1272년 로마에 당도하고나서 그의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전임자 그레고리오 9세의 뜻을 이어받아 공의회 소집에 착수한 것이었다. 교황으로 즉위한 지 이틀 후에 그레고리오 10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1274년 5월 1일 개최될 공의회에 초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ref>Thomas Rymer ''Foedera, Conventiones, Literae et cuiusque generis Acta Publica inter Reges Angliae et alios...'' editio tertia, Tomus I. pars 2 (The Hague 1745), pp. 121-122. 유럽의 다른 왕들과 제후들, 통치자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ref>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6월 5일 오르비에토를 떠나 1273년 11월 중엽에 리옹에 도착하였다.<ref>Augustus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671, 1672.</ref> 모든 추기경이 그를 따라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11월 29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카르도 안니발디 추기경과 조반니 오르시니 추기경은 아직 로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기 드 몽포르를 수감할 경비가 엄중한 곳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ref>Rymer, II. 2, pp. 134-135. Potthast, no. 20767.</ref> 두 추기경은 집안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로마에 남겨둔 것은 서로를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제2차 리옹 공의회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ref>Isidoro Carini, "Brevis Historia Concilii Lugdunensis," in ''Specilegio Vaticano di documenti inediti e rari estratti dagli Archivi e dalla Biblioteca della Sede Apostolica'' Volume I (Roma: Ermanno Loescher 1890), pp. 250-251.</ref> 그레고리오 10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를 즉시 만났는데, 필리프 3세는 즉위 이래 줄곧 열심히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필리프 3세가 [[브나스크 백작령]]을 교황에게 이양했기 때문에 양측의 만남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ref>Potthast, no. 20761 (1273년 11월 21일).</ref> 1274년 5월 1일 교황 선거법 제정, [[동서 교회의 분열]] 극복, 십자군 지원 등을 논의하기 위해 리옹에서 14번째 세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주된 목표를 세계 공의회 소집으로 정했으며, 세계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사안들을 다루게 하였다.
*[[동방 정교회]]와의 화해와 동서 교회의 분열 종식.<ref>J. M. Hussey, ''The Orthodox Church in the Byzantine Empire'' (Oxford-New York: OUP 2010), Section VIII, parts 1-3.</ref>
*새로운 십자군 원정 준비와 그를 위한 모든 교회의 지원금 납부.<ref>Maureen Purcell, ''Papal Crusading Policy, 1244-1291: The Chief Instruments of Papal Crusading Policy and Crusade to the Holy Land from the Final Loss of Jerusalem to the Fall of Acre 1244-1291'' (Leiden: E.J. Brill, 1975), especially pp. 135-195. Judith Bronstein, ''The Hospitallers and the Holy Land: Financing the Latin East, 1187-1274'' (Woodbridge, Suffolk, UK: Boydell Press 2005), pp. 127-133.</ref>
*교회의 부패 척결.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통한 교황 선거법 제정.
 
교황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적인 일에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럽]]의 여러 문제들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계 점령지들에 대해 소상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성지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부흥과 기독교 일치 회복 및 유럽의 정치적 질서 회복에 많은 괌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로잔의 [[합스부르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