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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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부패 척결.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를 통한 교황 선거법 제정.
 
교황은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규율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ref>Norman Tanner, ''Church in Council: Conciliar Movements, Religious Practice and the Papacy'' (New York-London: I.B.Tauris 2011), pp. 24-25. Cf. Edmund J. Fortman, ''The Triune God: A Historical Study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Eugene, Oregon, USA: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9), p. 229. William Crockett et al., ''Four Views on Hell'' (Grand Rapids, Michigan, USA: Zondervan, 1996), pp. 111-113.</ref>
 
그레오리오 10세는 십자군 지원을 위해 모든 성직자에게 수입의 10%를 6년 동안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다. 이전의 세계 공의회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성직자들에게 수입의 5%를 3년 동안 십자군 지원금으로 내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4배나 인상된 셈이었다. 이에 따라 26개의 세무소가 설립되었다.<ref>Baldwin, ''Pope Gregory X and the Crusades'', p. 4.</ref>
 
《위험이 있는 곳에》(Ubi periculum)는 콘클라베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제정했다.<ref>These are summarized from the Constitution 'ubi primus', by Franciscus Pagi, ''Breviarium historico-chronologico-criticum illustriora pontificum Romanorum, Conciliorum Generaliorum acta...'' III (Antwerp 1718), pp. 406-408.</ref>
 
교황은 재위 초기에는 정치적인 일에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럽]]의 여러 문제들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라틴계 점령지들에 대해 소상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성지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부흥과 기독교 일치 회복 및 유럽의 정치적 질서 회복에 많은 괌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로잔의 [[합스부르크 왕가|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