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85번째 줄:
 
그의 후임자는 생전에 가깝게 지낸 협력자인 도미니코회원 피에르 드 타랑테즈([[교황 인노첸시오 5세]])가 되었다.<ref>[http://www.csun.edu/~hcfll004/SV1276.html Conclave of 20-21 January 1276 (Dr. J.P.Adams).]</ref>
 
==시복과 시성==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황으로 재임한 동안 시성한 인물은 한 명이었다. 그는 1273년 9월 [[프란카 비살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프란차 비살타는 피아첸차 태생의 시토회 수녀로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엄격한 극기를 하였다. 그녀는 불과 7세의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가 14세 때 서원을 하였다. 나중에 그녀는 수녀원장으로 피선되었다.<ref>''Acta Sanctorum: Aprilis'' Tomus III (Antwerp 1675), pp. 379-404 (biography by Fr. Bertramo Reoldi, O.Cist.).</ref>
 
1270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사망하자 그레고리오 10세는 1272년 그에게 하느님의 종 칭호를 부여하고 그에 대한 시성 절차를 개시하였다.
 
1274년 그레고리오 10세는 [[루케치오 몬데스티니]]를 시복하였다.
 
==하얀색 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