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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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서양 열강들은 산업혁명으로 원료공급, 상품시장개척, 자본투자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이자, 세계최대의 해운국인 [[영국]]은 [[인도]]와 [[싱가포르]]를,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는 [[베트남]], [[알제리]], [[모로코]]/[[서사하라]]/모로코령 라퓨타를, 동유럽의 강대국 [[러시아]]는 [[폴란드]]와 [[시베리아]]를, 통일이후 [[독일]]은 [[탄자니아]]를 각각 획득하였으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남북전쟁후 서부개척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열강의 진출은 동아시아에까지 미쳐 [[청제국]]과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청조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문호개방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불연합군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의 포함외교에 굴복하여 천황의 칙허를 받지않고 가나자와조약을 체결하여, 전국각지에서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났으며, 급기야, 막부타도론이 대두되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동맹을 체결하여 막부를 공격, 타도하여 메이지천황을 옹립하면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였다.
이후, 유신정부는 문명개화론에 따라 서구식 체제변혁을 추구하고, 대외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73년]] 류큐어민피살사건을 구실로 타이완에 출병하여 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마츠다처분으로 류큐를[[류큐]]를 복속하였다병합하였다. 이후, 사이고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적용되었던 미국의 방식을 모방하여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로 [[1876년]](고종 13)에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副使)로 보냈다. 이들은 일진(日進)·맹춘(孟春) 등 3척의 군함으로 1876년(고종 13) 1월 부산에 입항하여,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도]]로 향하고,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로 하여금 예비교섭을 시켰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매우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申櫶)을 접견대관,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