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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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박('''박동훈''', 1981년생)은 한국계미국인 인권운동가, 음악가 (Malheur VOL)<ref>{{웹 인용|url=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11/2013071190015.html|제목="북한 주민에게 관심을" - TV조선|언어=ko|확인날짜=2017-09-19}}</ref>, 선교사이다. 특정단체와 연계되지 않은 초당파 “북한집단학살을 멈추기 위한 세계연대(Worldwide Coalition to Stop Genocide in North Korea)” 창립회원이며, 코리아헤럴드 컬럼니스트이다. 전쟁을 확고히 반대하며,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ref name=":1">{{뉴스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70913001002|제목=[Robert Park] Nation or collateral damage of preventive war?|성=Herald|이름=The Korea|날짜=2017-09-13|언어=en|확인날짜=2017-09-19}}</ref><ref>{{뉴스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70622000978|제목=[Robert Park] A path to free NK political prisoners|성=Herald|이름=The Korea|날짜=2017-06-22|언어=en|확인날짜=2017-09-19}}</ref><ref>{{뉴스 인용|url=http://khnews.kheraldm.com/view.php?ud=20170410000364&md=20170413003641_BL&kr=1|제목=북한에 대한 핵선제공격?|성=Herald|이름=The Korea|날짜=2017-04-10|언어=en|확인날짜=2017-09-19}}</ref>
 
2009년 12월 25일 북한의 제노사이드와 반인도범죄에 항거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다. 2010년 2월 6일 북한 당국에 업류된지 43일만에 풀려났다. 그를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가 북한에 다녀온 후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으며, 심한 충격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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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캘리포니아 LA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한반도 분단 전 북한에서 존경 받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증외조부 한용겸 장로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신자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 받았고 출소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외증조부 한정교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고, 외증조모, 외조모는 [[주기철]] 목사의 교회에 출석하였다. 조모 한혜주 권사는 그가 성직자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유관순]], [[조만식]] 등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영향을 주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8112/20170306/%EA%B3%A0%EB%8B%B9-%EC%A1%B0%EB%A7%8C%EC%8B%9D-%EC%84%A0%EC%83%9D%EC%9D%84-%EC%B6%94%EB%AA%A8%ED%95%98%EB%A9%B0.htm|제목=고당 조만식 선생을 추모하며|날짜=2017-03-06|뉴스=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언어=ko|확인날짜=2017-09-19}}</ref>
 
10대 후반부터 뇌성마비, 근이영양증, 뇌전증, 자폐증 등 장애인들을 위해 간병인과 자원봉사자로 약 7년간 일했으며, 장애인들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다. 수도원에 소속되거나 카톨릭 사제의 직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수도승 같이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철저하게 금욕, 금식, 순결의 삶을 살았다.<ref name=":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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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멕시코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북한에 가기 전까지 한국과 중국에서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만났으며, 남한에서 만난 많은 탈북난민들과 절친한 벗이 되었다. 탈북민들을 높여주고 마음 깊이 존경하였다. 자신이 만난 탈북난민들을 가족처럼 사랑했다. 많은 탈북민들이 그의 진심을 알고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ref name=":0" />
 
“… 사랑은 세상의 모든 악을 이긴다. 북한 선천이 할머니의 고향이라며 삶의 궤도는 다르지만 같은 민족이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시 강조하면서 탈북민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그 사랑이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파 속에 얼어붙었던 마음들을 녹이고 악심으로 삐뚤어졌던 마음이 바로 서게 하는 힘이었다. 이 세상에 좋은 분들이 많겠지만 내가 직접 만나본 몇 분 안 되는 천사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때 내가 지금 와 있는 곳이 자본주의 남한이라는 것을 잊고 살만큼 그 분의 삶의 향기는 진했다. 비록 두석달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속으로 늘 존경하던 테레사 수녀님의 삶을 그분을 통해서 그려볼 만큼 잠시라도 책에서만 보던 하늘나라 천사의 삶을 보았다.”( - "로버트박의 목소리" 66p)
 
북한사람들의 생명, 회복, 자유와 해방을 위해 쉬지 않고 거리 시위와 교회 집회를 이끌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파고다공원에서 시위하고, 2009년 추석에는 신촌에서 단식시위를 했다. 시위 때는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신원노출을 피했다. 중국에서 사역할 때는 이름과 외모도 수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2009년 12월 25일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다. 입북 직전 12월 23일 행했던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ref name=":3">{{웹 인용|url=http://blogs.reuters.com/global/2009/12/30/interview-with-north-korea-border-crosser-robert-park/|제목=Interview with North Korea border crosser Robert Park|성=Herskovitz|이름=By Jon|확인날짜=2017-09-19}}</ref>는 입북 후에 발표되었다.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제노사이드입니다. 핵무기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치범수용소를 운영하고, 어떠한 제재도 없이 사람, 여성, 아이들을 마구 죽이는 국가는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 저의 요구는, 저는 풀려나기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이 와서 돈을 지불하고 저를 데려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대신 저는 북한 사람들이 풀려나기 원합니다. 정치범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저는 그 곳에서 나오기 원치 않습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성경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우리는 그 사람들을 우리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ref name=":3" /> (로버트박의 목소리 71-72p)
 
2010년 2월 6일 북한 당국에 업류된지 43일만에 풀려났다. 그를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가 북한에 다녀온 후 심각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으며, 심한 충격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ref name=":0" />
 
=== 북한에서 돌아온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