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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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6월]] 말 다시 대사헌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월 7일]] 우찬성, 우찬성 겸 보양관에 제수되었으나 임명된지 17일만에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다. [[1609년]] [[3월]]에 [[의정부]][[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자 올라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외곽에서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 이황이언적, 이언적이황 문묘종사 비판 ====
[[광해군]] 때 [[이황이언적]]과 [[이언적이황]]의 [[문묘]] 종사론이 나타났을 때 스승 [[조식]]은 제외되자 이황이언적, 이언적의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종래 문묘에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새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 정인홍은 왕이 그의 문병을 위해 내의와 예관을 보내 상경할 것을 당부하자, 사직상소를 올렸다.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그는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도리어 그는 [[이황]]이 스승 [[조식]]을 비난했던 것을 언급하며 스승 조식을 변호하였다.
 
{{인용문2|신(정인홍)이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읍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임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즉 퇴계가 남명과 성운을 평한 말을 빌어, 이황의 출처가 분명치 못함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묘종사에 반대한 것에 분개한 [[이황]]의 제자들, [[이언적]]의 제자들이 그를 공격하였다. 이 일로 인해 조정과 사림에서는 큰 논쟁이 발생했다. [[이황]]의 문도들이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현재의 동맹휴학과 같음)에 들어갔으며 그는 [[성균관]]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청금록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들의 명부(名簿)이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