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공업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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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공업학교는 [[대한제국]] 때 성립된 공업전습소가 승격되어 설립된 관립 전문학교였다. [[일본]]의 직공학교 수준에 불과했던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발전함에 따라 진정한 고등공업교육이 시작되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대일본제국 시절과 [[대한민국]]의 공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고, 학과로는 방직과, [[토목공학|토목]]과, [[건축공학|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응용화학과에는 요업, 염색, 응용화학의 세과(細科)가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공학|기계]]과가 가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이 만주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로를 폭파 시키면서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시작 되었다. 만주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기계과, 토목과, 건축과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0년대까지 [[조선]]의 유일한 고등공업기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전문학교에 비해 특수한 학교로 여겨졌다.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에는 조선인을 전체정원에서 2/3가량 선발한다는 내규가 있어 조선인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지만, 교육령 개정 이후 그러한 내규가 폐지되어 입시 경쟁률은 13:1에서 27:1까지 폭증하게 되었고 조선인의 입학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1935년]]의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계에서는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의 조선인 입학난과 함께 경성고공과 경성고상의 입시제도를 조선인에게 유리하게 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고, 학과로는 방직과, [[토목공학|토목]]과, [[건축공학|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응용화학과에는 요업, 염색, 응용화학의 세과(細科)가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공학|기계]]과가 가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과 [[만주]]로의 대륙침략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병참기지적 공업화가 가속화되자 기계과, 토목과, 건축과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 각지와 [[만주국]]의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 경영자 수요가 급증하자 광산과의 인기도 높아졌다. 광업분야 수요가 폭증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광산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39년에는 광산과를 분리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41년]]에는 이과양성소(理科養成所)가 부설되어 수학, 물상, 화학, 생물 중등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교명이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바뀌었으며, 원동기과와 전기화학과, 전기통신과가 추가 설치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다.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의 상당수가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채용되었으며, 방직과와 응용화학과 출신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술인력이 희소했기 때문에 조선인 졸업자도 타 전문학교 출신자와 달리 지방관청이나 일본인 기업에 취직하는데 차별을 받지 아니했다. 이와 같은 취직의 유리함은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입시경쟁률을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