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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ne page of Yu Hyungwon's Bangyesoorok.jpg|thumb|right|180px|[[반계수록]] 본문의 일부]]
 
《'''반계수록'''》(磻溪隨錄)은 [[1670년]]([[조선 현종|현종]] 11년)에 완성되어 [[1769년]]([[조선 영조|영조]] 45년)에 간행된 반계 [[유형원]]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국가체제에 관한 책이다. 총26권. 유형원의 만년의 저작으로 저자의 나이 52세 되던 해부터 20년에 걸친 연구와 탐구를 토대로 집필하였다. 젊은 시절 지방을 자주 유람하면서 직접 목격한 민생의 현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은거하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며 얻은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계'는 유형원이 살던 우반동의 이름에서 따온 그의 호이며, '수록'이란 '붓 가는 대로 갈겨 쓴 글'이라는 저자의 겸손이 담겨있다.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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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및 평가 ==
[[파일:Hwaseong west gate.jpg|thumb|200px|수원 [[화성]]의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정조]]의 수원[[화성]] 축조에는 [[유형원]]이 제시한 성지 축성에 대한 이론과 주장이 그 뒷받침으로 작용했다.]]
17세기 중ㆍ후반의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이어진 전란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구조 개편이 요구되었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대두된 것이 실학이었고 실학에서 가장 크게 강조된 개념이 바로 '개혁'이었는데,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그 '개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을 체계적으로 세분화하여 정리했으며 그것은 후대의 남인 실학자들의 개혁사상의 원류이자 '개혁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데다가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북인]] 계열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는데, [[조선 숙종|숙종]] 4년([[1678년]]) [[유형원]]과 평소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가 상소하여 《반계수록》이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했고, 영조 17년([[1741년]])에도 [[유형원]]의 제자였던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경연에서 《반계수록》을 강론하자고 청하는 등 《반계수록》의 중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일찍이 소론 계열의 학자로서 [[유형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윤증|윤증(尹拯)]]은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탄하였는데, 그가 타계한지 38년이 지난 1711년에 책의 내용에 감명을 받아 직접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은 그의 저서를 구해다 집에 두고 읽어보면서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을 둔 자가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저술한 공로가 그때서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니 어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며 극찬하였다. 마침내 [[영조]] 36년([[1760년]]) [[영조]]는 《반계수록》3부를 국가에서 인쇄, 간행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 또한 《반계수록》에 주목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원 화성 등의 축조로 유형원 자신이 《반계수록》에서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함을 주장한 바 있으며, 정조는 "백 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했다"며 유형원을 높이 평가했다. 토지소유관계를 초점으로 삼은 그의 개혁론은 이후 중농주의 실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논점이 되었지만, 대토지 소유자의 반발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린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등, 실제 시행하기에 약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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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병주]],「규장각에서 만난 조선의 명품들」2007, 책과함께
 
== 바깥외부 링크 ==
* [http://www.krpia.co.kr/pSubject/Subject_View.asp?svcid=KR&proid=44&sbjtCode=KRPIA&sbjgcode=I 반계수록]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