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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은 대한민국 최초의 무선 방송을 시작했던 방송국으로 현재의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이다. 미국에서 1920년 세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KDKA (AM)]]) 이후 7년 만이었으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도쿄]]([[NHK 방송센터|JOAK]]), [[오사카]]([[NHK 오사카 방송국|JOBK]]), [[나고야]]([[NHK 나고야 방송국|JOCK]])에 이어 4번째 방송국이었다. [[1926년]] [[11월 30일]], 사단 법인 경성방송국의 설립이 허가되어, [[12월 9일]]에 방송용 사설 무선 전화 시설이 허가되었다 ([[호출부호]] JODK, 사용 전파장: 367m ([[주파수]]: 817kHz), 공중선 전력 1kW). [[1927년]] [[1월 20일]]에 시험 방송을 시작했지만, 다른 방송국과의 혼신을 피하기 위해서, 전파장을 345m (주파수: 870kHz)로 변경하고, 2월16일에 본방송을 시작했다. 장비는 영국산 마르코니 6Q형 방송송신기와 15kW급 변압기 4개, 14kW급 충전용 전동발전기 3대, 6kW급 송신기용 전동 교류발전기 2대 등이었다.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 발사는 오후 1시였다.
 
사옥의 위치는 서울시 [[중구]] [[정동]] 1번지였다. 초기에는 방송국 건물에서 직접 전파를 송출한 형태였다.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7시간 방송을 하였는데 방송 내용은 일본어 70%와 한국어 30%정도의 비율로 교차되어 방송하였다. 나중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로 분리되었었다.
 
== 방송내용역사 ==
=== 발전개국 ===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7시간 방송을 하였는데 방송 내용은 일본어 70%와 한국어 30%정도의 비율로 교차되어 방송하였다. 나중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로 분리되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라디오]]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는 조선인이 주관하는 첫 라디오 시험방송을 보도했고, 우미관에서 열린 시연회 행사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수가 3천 명에 달해, 입장권 배부처 옆 도로는 [[전차]] 통행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1925년 여름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라디오 시험방송을 개시하였고, 1년 6개월 동안 경성 방송국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방송국의 부지는 높은 지대를 고려해 해발 84m의 [[정동]] 1번지로 정해졌는데 당시만 해도 큰 건물이 없어 시내가 한 눈에 다 보이는 고지대였다. 완공 당시 경성방송국 사옥은 대지 190평, 지하 1층-지상 2층에 방송용 첨탑을 갖춘 건물이었다.<ref name="개국">{{서적 인용|제목=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날짜=2005|출판사=황소자리|쪽=198-199|확인날짜=2017-09-23}}</ref>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정각, 경성방송국이 JODK라는 [[콜 사인]]과 함께 첫 전파를 쏘아올렸다. 당시 JODK라는 콜 사인은 [[도쿄방송국]]의 JOAK, [[오사카]]방송국의 JOBK, [[나고야]]방송국의 JOCK 다음으로 개국하였다는 의미에서 알파벳 'D'가 배정되었다. 콜 사인은 일본인 방송주임 미쓰나가가 [[일본어]]로 진행하였으며 곧이어 국내 최초의 여성 방송인이자 아나운서였던 [[이옥경]]이 한국어로 동시 통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ref name="개국"/>
== 발전 ==
경성방송국은 1932년 4월 7일 법인명을 조선방송협회로 개칭한다.
1935년에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4월 26일에는 [[일본어]]로 방송하는 900kHz의 경성제1방송과 [[한국어]]로 방송하는 610Khz의 경성제2방송을 하기 시작하였고 방송기술과 장비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뉴스]], [[드라마]]등의 방송내용도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또한 시장에 스피커 내장식의 휴대용 라디오가 많이 보급되어 라디오 전성기를 이루었다. 1937년에는 10만대의 라디오가 한국에 보급되었다. 전국 방송을 위해 [[연희동]]에 10kW급 연희 송신소를 만들었고 이후 50kW로 출력을 증강하였다.
 
초창기 경성방송국의 편성표는 [[뉴스]], 기악연주, 단가, 만담, 강연, 소설 낭독, 외국어 강좌, 라디오극, 국악 등으로 구성되었다. 개국 당시 뉴스는 오후 3시 50분과 오후 7시로 두 차례 방송되었는데 이는 방송국 직속 기자가 없어 통신에 의존했기 때문이었으며, 공공기관의 공지를 주요 뉴스로 전했기 때문에 휴일에는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라는 내용을 전하기도 했다.<ref name="개국2">{{서적 인용|제목=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날짜=2005|출판사=황소자리|쪽=201-202|확인날짜=2017-09-23}}</ref>
=== 지방방송 ===
 
1935년 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였고 이해에 [[부산]]에서 부산방송국(JBAK)이 개국하였으며 1936년에는 [[평양]](JBBK)에, 1937년에는 [[청진시|청진]](JBCK)에, 1938년에는 [[익산시|이리]](JBFK)와 [[함흥]](JBDK)에 지방방송국을 잇달아 설치하였다. 이후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김책시|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 등 10여개 도시에 지방방송국이 개국하였다. 그러나 1945년 종전 직전 8월 13일에 청진방송국은 [[소련]]의 진주에 때문에 방송장악을 우려한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어 없어졌다.
=== 발전 ===
경성방송국은 1932년 4월 7일 법인명을 조선방송협회로 개칭하였으며, 1935년에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4월 26일에는 [[일본어]]로 방송하는 900kHz의 경성제1방송과 [[한국어]]로 방송하는 610Khz의 경성제2방송을 하기 시작하였고 방송기술과 장비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뉴스]], [[드라마]]등의 방송내용도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또한 시장에 스피커 내장식의 휴대용 라디오가 많이 보급되어 라디오 전성기를 이루었다. 1937년에는 10만대의 라디오가 한국에 보급되었다. 전국 방송을 위해 [[연희동]]에 10kW급 연희 송신소를 만들었고 이후 50kW로 출력을 증강하였다.
 
1935년 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였고 이해에같은해에 [[부산]]에서 부산방송국(JBAK)이 개국하였으며 1936년에는 [[평양]](JBBK)에, 1937년에는 [[청진시|청진]](JBCK)에, 1938년에는 [[익산시|이리]](JBFK)와 [[함흥]](JBDK)에 지방방송국을 잇달아 설치하였다. 이후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김책시|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 등 10여개 도시에 지방방송국이 개국하였다. 그러나 1945년 종전 직전 8월 13일에 청진방송국은 [[소련]]의 진주에 때문에 방송장악을 우려한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어 없어졌다.
 
=== 전시 방송 ===
{{참고|단파밀청방송 사건}}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3일]]에는 청진방송국이 [[소련]]의 진주에 방송장악을 우려한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9월]]부터부터는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에 [[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출처|날짜=2014-05-13}}
 
== 수신료 ==
* 1943년 7월 30일: 총 285,000대
* 1944년 12월 31일: 총 300,050대
 
== 전시 방송 ==
{{참고|단파밀청방송 사건}}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에 [[해방]] 이후 [[9월]]부터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에 [[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출처|날짜=2014-05-13}}
 
== 외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