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티노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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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시몽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우르바노 4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4세]] 때도 마찬가지였다.<ref>우르바노 4세 및 클레멘스 4세와 시몽 추기경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Edmund Martène and Ursine Durand, ''Thesaurus novus anecdotorum'' Tomus Secundus (Paris 1717), 1-636.</ref> 1264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날, 시몽은 파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ref>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19.</ref> 그는 1274년 8월 1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재차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1279년까지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그가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만프레디]]에 맞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과 지원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ref>Martene and Durand, p. 114, Epistle 32.</ref> 그는 곧 앙주의 샤를이 [[카를로 1세]]로서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였다. 특사로서 그는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몇 차례 주재하고 그레고리오 교황의 십자군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시노드는 1276년 9월 13일 [[부르주]]에서 열린 시노드였다.<ref>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 Adolphe-Charles Peltier, ''Dictionnaire universel des conciles'' I (Paris 1847), 358. Carl Joseph von Hefele, ''Conciliengeschichte nach dem Quellen bearbeitet'' second edition Volume VI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890) 176-177.</ref>
 
시몽은 교황 특사로 계속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5세]], [[교황 하드리아노 5세]], [[교황 요한 21세]], [[교황 니콜라오 3세]] 등이 선출된 콘클라베에 연이어 참석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지 일주일 후에 프랑스의 교황 특사 시몽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와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가 화해를 하도록 했다.<ref>Otto Posse, ''Analecta Vaticana'' (Oeniponti: Libraria Academica Wagneriana 1878) #898.</ref> 아라곤의 왕이 된 후, (시칠리아의 콘스탄체와 혼인한) 알폰소는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를로 1세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의 평화 촉구는 카를로 1세와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1279년 4월 22일 니콜라오 3세는 시몽에게 필리프 왕에 관한 친서를 써서 보냈다. 교황이 마상 시합 금지령을 내렸지만, 필리프 왕과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어기고 마상 시합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은 금지령을 어긴 프랑스 왕을 파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ref>Augustinus Theiner (Editor), ''Caesaris S. R. E. Cardinalis Baronii, Od. Raynaldi et Jac. Laderch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Vigesimus Secundus 1257-1285 (Barri-Ducis: Ludovicus Guerin 1870), under the year 1279, &sect; 17, p. 454. 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742, no. 21567.</ref>
시몽은 교황 특사로 계속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5세]], [[교황 하드리아노 5세]], [[교황 요한 21세]], [[교황 니콜라오 3세]] 등이 선출된 콘클라베에 연이어 참석할 수가 없었다.
 
[[1281년]] 교황이 된 후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나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그곳에 거처를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