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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은 교황 특사로 계속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5세]], [[교황 하드리아노 5세]], [[교황 요한 21세]], [[교황 니콜라오 3세]] 등이 선출된 콘클라베에 연이어 참석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지 일주일 후에 프랑스의 교황 특사 시몽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와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가 화해를 하도록 했다.<ref>Otto Posse, ''Analecta Vaticana'' (Oeniponti: Libraria Academica Wagneriana 1878) #898.</ref> 아라곤의 왕이 된 후, (시칠리아의 콘스탄체와 혼인한) 알폰소는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를로 1세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의 평화 촉구는 카를로 1세와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1279년 4월 22일 니콜라오 3세는 시몽에게 필리프 왕에 관한 친서를 써서 보냈다. 교황이 마상 시합 금지령을 내렸지만, 필리프 왕과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어기고 마상 시합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은 금지령을 어긴 프랑스 왕을 파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ref>Augustinus Theiner (Editor), ''Caesaris S. R. E. Cardinalis Baronii, Od. Raynaldi et Jac. Laderch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Vigesimus Secundus 1257-1285 (Barri-Ducis: Ludovicus Guerin 1870), under the year 1279, &sect; 17, p. 454. 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742, no. 21567.</ref> 니콜라오 3세는 교황청에 대한 앙주 가문의 영향력을 희석시키고자 추기경을 추가로 10명을 선임하고 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의 비중을 상당히 늘렸다. 니콜라오 3세는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회를 총애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영향력 또한 강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의 영향력 아래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시몽 드 브리옹은 1279년 10월 19일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ref>H. Denifle, ''Chartularium Universitatis Parisiensis'' I (Paris 1889), p. 578. 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ref> 니콜라오 3세는 1280년 8월 22일 비테르보에서 뇌졸중에 걸려 선종했으며,<ref>Bernardus Guidonis, "Vita Nicolai III" in Ludovico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III. 1 (Milan 1733), p. 606-607.</ref> 그가 선종할 당시 추기경은 13명이 있었다.<ref>Conrad Eubel,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I editio altera (Monasterii 1913), p. 10 note 3.</ref> 카를로 1세는 오르시니 가문의 적이면서 니콜라오 3세가 선종한 후 일어난 시가전에서 패해 로마에서 쫓겨난 안니발디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하였다.<ref>Gregorovius, Volume V, part 2, pp. 491-492.</ref> 안니발디는 비테르보로 피신해 그곳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비테르보 시장이자 선종한 전임 교황의 조카인 오르소 오르시니를 몰아냈다. 그러자 곧바로 앙주파는 콘클라베를 장악했는데, 당시 그레고리오 10세가 세운 규칙들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3세가 세운 규정에 따라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선출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필요했다. 오르시니파나 프랑스 어디에서도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상대 진영의 후보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1280년 2월 2일 성모 취결례 축일에 성난 군중들이 콘클라베가 열리고 있는 주교 관저로 쳐들어가 마테오 오르시니 추기경과 전임 교황의 동생인 조르다노 오르시니 추기경을 납치했다.<ref>Giovanni Villani, ''Cronica'' Book VII, chaper 58 (ed. Dragomanni) Tome I (Firenze 1844), pp. 391-392.</ref> 그러자 시몽 드 브리옹이 1281년 2월 22일 반대 없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르티노 4세로 명명했다.<ref>원래대로 하자면 교황은 마르티노 2세라는 이름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인명록에인명록에서 등장하는[[교황 마리노 1세와1세]]와 [[교황 마리노 2세가2세]]가 마르티노 2세 그리고2세와 마르티노 3세라는 이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마르티노 4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ref>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