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티노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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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로마는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티노 4세는 라티노 오르시니 추기경과 조프레도 다 알라트리 추기경을 친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 로마에 들어가서 사순 제1주일에 대관식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ref>Theiner, ''Caesaris S.R.E. Card.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22, under the year 1280, &sect; 5, pp. 483-484. Gregorovius, Volume V, part 2, pp. 493-495.</ref>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시민회의를 소집해 순전히 개인적 역량만 보고 조반니 가에타니 오르시니를 자신들을 대변하는 원로원 의원으로 뽑고 조반니에게 그의 대리인을 임명할 권한까지 주었다. 결국 마르티노 4세는 1281년 3월 23일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평생 로마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라바냐의 피에트로를 자신의 대리로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1281년 4월 30일 마르티노 4세는 카를로 1세를 재차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였다. 카를로 1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로마의 원로원을 겸직하게 되었다.<ref>Gregorovius, Volume V, part 2, p. 494.</ref> 거의 모든 면에서 카를로 1세에게 의존했던 마르티노 4세는 과거 [[제4차 십자군]]이 세웠던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카를로 1세의 계획을 지지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를 파문하였다. 이로써 그는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겨우 이루어낸 동서 교회의 미약한 일치를연대마저 파탄내고 더이상의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282년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유명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ref>Steven Runciman, ''The Sicilian Vespers: A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Later Thirteenth Century'' (Cambridge, England: University Pres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8). ''I papi ed i vespri siciliani. Con documenti inediti'' (Roma, Stamperia vaticana, 1882). Michele Amari, ''La Guerra del vespro siciliano'' seconda edizione (Paris 1843). F. Soldevila, ''História de Catalunya'' (Barcelona 1962), I, pp. 377-402.</ref> 시칠리아 주민들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 (아라곤)|페드로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 교황에게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교황의 속국임을 기꺼이 자처했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의 앙주 왕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영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그의 아라곤 왕국을 몰수하고 그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으나<ref>{{cite book |first=Jim |last=Bradbury |title=The Capetians: Kings of France, 987–1328 |location=London |publisher=Continuum Press |year=2007 |page=239 |isbn=9781852855284 }}</ref>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