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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2년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유명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ref>Steven Runciman, ''The Sicilian Vespers: A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Later Thirteenth Century'' (Cambridge, England: University Pres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8). ''I papi ed i vespri siciliani. Con documenti inediti'' (Roma, Stamperia vaticana, 1882). Michele Amari, ''La Guerra del vespro siciliano'' seconda edizione (Paris 1843). F. Soldevila, ''História de Catalunya'' (Barcelona 1962), I, pp. 377-402.</ref> 시칠리아 주민들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 (아라곤)|페드로 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 교황에게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교황의 속국임을 기꺼이 자처했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의 앙주 왕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영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그의 아라곤 왕국을 몰수하고 그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으나<ref>{{서적 인용|first=Jim |last=Bradbury |title=The Capetians: Kings of France, 987–1328 |location=London |publisher=Continuum Press |year=2007 |page=239 |isbn=9781852855284 }}</ref>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의 다툼이 반복되자 참다 못한 오르비에토 시장 라이네리우스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마르티노 4세는 더이상 오르비에토에 잔류할 수가 없었다.<ref>A. Theiner, ''Caesaris S.R.E. Card.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22 (Bar-le-Duc 1870), p. 537, under the year 1284, no. 17.</ref> 그는 교황청을 이끌고 1284년 6월 26일 오르비에토를 나와 10월 4일 페루자에 들어갔다.<ref>Edith Pasztor, "Per la storia dell'amministrazione dello stato pontificio sotto Martino IV." ''Miscellanea in onore di Monsignor Martino Giusti'', Vol. 2 (Vatican City, 1978), pp. 181-194.</ref>
한편 교황은 샤를의 지위를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강화시켜 로마의 원로원이 되게 하고 그의 동방 계획을 지지하였다. [[1281년]]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한 [[미카일 8세|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파문하고 이어서 프랑스를 위해 [[시칠리아]]를 구하려고 노력한 [[아라곤의 페드로 3세]]도 파문하였다. 교황은 수도회들을 좋아하여, 특히 [[프란치스코회]]에는 칙서를 내려 그들의 설교와 고해성사권을 부여하고 가난에 관한 규율을 완화시켰다.
 
마르티노 4세는 1285년 3월 25일 주님 부활 대주일에 페루자 대성당에서 장엄 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고나서 평소처럼 교황 전속 사제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그리고 3월 28일 새벽 5시경에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페루자에 있는 산 로렌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후임자는 그가 선종한지 4일이 지난 4월 2일에 선출되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