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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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과로]]로 얻은 병과 폐질환, 지병인 [[간질]] 등의 증세로 계속해서 병고에 시달려 자리에 노운 아르눌프의 생애 말년 3년 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896년]]에는 눈꺼풀에 [[사면발이]]에 물려서 피부질환을 겪었다. 황제권은 불안정한 가운데 [[모라바인]]들과 [[헝가리인]]들이 [[독일]]에 침입했고, 로트링겐에서는 [[츠벤티볼트]]에 대항한 반란, 폭동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이탈리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서프랑크]]([[프랑스]])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다.<ref name="daum1"/> 또한 해적들은 수시로 왕국의 남부 해안가에 출몰, 약탈을 감행해 그를 괴롭혔다. [[동프랑크 왕국]] 내부에서도 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은 심화되었다. 아르눌프는 바로 [[로트링겐]]에도 군사를 보내 소요 사태를 강경진압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898년]]에는 [[서프랑크 왕국|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된 [[샤를 3세 (서프랑크)|단순왕 샤를 3세 생쁠]]이 국경을 넘어 [[라인 강]]까지 쳐들어왔고, [[로타링기아]]를 지속적으로 침략하였다.
 
[[899년]] 봄, 아르눌프는 반란의 조짐을 보이는 [[모라바]]를 통제하기 위해 [[마자르족]]의 몇몇 부족을 [[판노니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 [[마자르족]]은 아르눌프 사후 [[동프랑크 왕국]] 영토 동부지역을 약탈하는 골칫거리가 된다. 그는 [[중풍]]과 [[뇌졸중]]으로 고생했지만, 스스로 움직이려 노력하여 의사소통과 신체 움직임은 가능했다. 아르눌프는 [[마자르족]]과 밀약을 맺고, 정착을 돕는 대신 동프랑크 왕국에 대한 약탈을 중단하고 대신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 1세]]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899년]] [[6월]]에는 계비 [[네우스트리아의 오타]]가 귀족들에 의해 간통죄로 고소당하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정에 소환되었다. 아르눌프는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를 사생아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 자문관을 보내 오타를 돕게 했다. 법정에서 오타 황후는 열렬히 무죄를 주장했고, 참석한 귀족들 증 72인의 귀족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어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몇주 뒤 아르눌프는 [[중풍]]과 [[뇌졸중]]으로 다시 쓰러졌고, 병세가 심각해지자 [[바이에른]] 성으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이때 그가 누군가에 의해 중독되었다는 음모론이 계속 제기되었다. 아르눌프는 [[899년]] [[12월 8일]]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 라티스보른(Ratisbonin)에서 [[간질]]과 [[뇌졸중]], [[중풍]], [[폐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왕위는 유일한 적자인 [[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루트비히 3세 (이탈리아)|프로방스의 루이 맹인왕]]이 계승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친척이자 추종자였던 [[프리울리]]의 [[베렌가리오 1세|베렝가르]]가 왕위를 계승하나 이후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