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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용 전투('''Battle of Fort Carillon 또는 1758년 타이컨터로가 전투<ref name=C57>[[#Chartrand|Chartrand (2000)]], p. 57</ref>)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챔플레인 호수]]가에 있는 카리용 요새(현재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약 1.2㎞2km 떨어진 언덕에서 펼쳐졌다. 프랑스군은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장군과 프랑스와 [[가스통 드 레비]]가 이끄는 4,000명 병력이었고, 반면 압도적으로 수적 우세에 있었던 영국군은 [[제임스 에버크롬비]]가 지휘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전면에서 기습을 받았고, 영국군은 참호로 둘러싸인 프랑스 진지를 대포도 없이 공격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전투로, 양군의 사상자는 3,000명이 넘었고, 그중 2,000명 이상이 영국 병력이었다.<ref name="Nester7">[[#Nester|Nester (2008)]], p. 7</ref> 미국의 역사학자인 로렌스 헨리 깁슨은 에버크롬비의 전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역사상 어떤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군사 작전도 이렇게 지휘관의 판단 착오가 많은 전투는 단 한 번도 없었다.”<ref name="GipsonQuote">[[#Gipson|Gipson]], p. 232</ref> 많은 군사 역사 연구가가 카리용 전투는 전술면에서 군사적 무능의 전형으로 인용하고 있다.<ref name="Nester162_4Fault">[[#Nester|Nester (2008)]], pp. 162–164 lists a variety of historically critical sources, and also rebuts a number of attempted defenses of Abercrombie.</ref>
몽칼름이 도착하기 전 카리용 요새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것은 프랑스와 샤를 드 부르라마끄 대령으로 [[6월 23일]] 경에 영국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할 것을 알게 되었다. 부르라마끄는 6월 10일에 보드레이유를 통해 에버크롬비에게 편지(대립하는 지휘관끼리 주고받는 의례적인 인사의 일환)를 전령에게 보내게 하고, 그 전령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전령은 영국군의 주둔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에게 잡혀있었다. 부르라마끄는 정찰 활동을 확대하고, 또한 포로로 잡은 영국 척후병에게서 영국군의 대략적인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6월 30일]], 몽칼름이 카리용 요새에 도착했다. 거기서 본 것은 확연히 병력이 부족한 주둔 부대였다. 병력은 3,500명밖에 없고, 식량은 9일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르라마끄는 몽칼름에게 영국군 2만명 이상이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집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몽칼름은 요새에 접근해 올 많은 적에 대한 방어전략을 취했다. 몽칼름은 즉시, 부르라마끄와 3개 대대를 파견하여 6마일(9.7&nbsp;km) 떨어진 조지 호수의 북단에서 2마일 (3.2 km) 떨어진 도하지점을 점령하고, 제재소의 전진 기지를 강화하게 하였다. 나머지 잔류 병력은 요새 밖의 추가적인 방어 시설 마련에 투입하였다. 몽칼름 또한 이 상황을 ​​몬트리올에 전하고 가능하다면, 레비와 그 병력을 증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레비 병력은 브드레이유가 서쪽 변경 요새를 방어 임무를 맡았던 병력이었다. 레비는 아직 서쪽으로 떠나 않았고, 브드레이유는 그와 4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서쪽이 ​​아니라 카리용으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이 몬트리올을 떠난 것은 [[7월 2일]]이었다. 7월 5일에 부르라마끄가 답장을 받았을 때, 영국 함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트레뻬제 대위와 350명의 부대를 보내, 함대를 감시하게 하고 가능하면 상륙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영국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조지 호수의 수면을 덮어 버릴 정도의 규모’라고 했다. 몽칼름은 부르라마끄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방비 태세에 만족해 있던 부르라마끄는 몽칼름으로부터 세 차례 퇴각 명령을 받을 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작전 범위를 알게 된 몽칼름은 모든 병력을 카리용 요새로 후퇴시켰고, 수로와 교량을 파괴했다. 이 퇴각으로 트레뻬제 군은 본대로부터 고립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인디언의 척후가 영국 함대의 규모를 두려워 해서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7월 6일]]의 황혼 때 프랑스군은 요새의 북서쪽 1.2 km 떨어진 고지대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이 언덕은 요새로 향하는 진격로가 될 길이었다. [[7월 7일]], 참호 아래에 상당한 길이에 걸쳐 울타리(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가시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울타리)를 둘렀다. 날이 저물 무렵, 참호 위로 흉벽을 둘렀다. 이 급조된 방어시설은 총격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영국군 대포 공격에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영국군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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