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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신]]'''(盧思愼, 1427년 ∼ 1498년)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노한]]의 손자이며, 할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처제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의 여동생으로 [[세종]]의 처제로 2대에 걸쳐 왕실과 인척관계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도승지에 올라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 1492년(성종 23)에는 좌의정, 1494년(성종 25)에는 부원군(府院君)에 봉군, 1495년(연산군 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 '''[[노공필]]'''(盧公弼, 1445년 ~ 1516년)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노사신]]의 아들이다.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1466년 춘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483년 [[사헌부]] 대사헌, 1489년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1500년 교성군에 봉해지고 1503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다가 중종반정 후인 1507년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명나라로 가서 중종의 즉위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14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공편(恭褊)이다. 아들 노섭(盧燮)은 사복시 첨정 등을 지냈다.
* '''[[노봉천]]'''(盧奉天, 1594년 ~ 1637년) :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노경천(盧擎天)과 함께 충청감사의 군영에 합류하여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선봉장으로 나서 싸우다 전사하고 후에 숙종 16년(1690)에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호는 병암(屛庵), 자는 여주(汝柱)이다. 창성군 [[노진]]과 충남 한산(서천)에 정착한 [[노윤보]]의 후손이다. 1617년에 음직으로 예빈검정(禮賓儉正)이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북쪽의 여진족이 소란을 피우자 출전하여 큰공을 세웠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웠다.
* [[노승환]](盧承煥, 1927년 ~ 2014년) : 제8·9·10·12·13대 국회의원, 민선1·2기 마포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