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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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후사가 없이 사망했으므로 900년 11월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포르츠하임]]에서 귀족들을 소집, [[서프랑크]]의 [[샤를 3세 (서프랑크)|단순왕 샤를 3세 생쁠]]과 [[프랑켄]] [[공작]] [[콘라두스 1세|젊은 콘라트]]를 후보자로 세웠다. 결국 투표 결과, 그의 근친이자 프랑켄의 공작인 [[콘라두스 1세]]를 왕으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의 시신은 부왕 [[아르눌프 폰 케른텐|아르눌프]]의 석관이 안치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에메람 수도원(St. Emmeram)에 안치되었다.<ref>James Bryce: A Római Szent Birodalom, A Magyar Tudományos Akadémia kiadása, Budapest, 1903, 315. oldal</ref>
 
유아왕 루트비히의 사후 [[동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국왕(rex francorum orientalium) 또는 프랑크인의 국왕(rex francorum)이라는 칭호는 [[콘라트 2세 (신성 로마 제국)|콘라트 2세]]까지 사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