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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3세기-기원전 7세기==
황하 유역이 이 시한의 시초에 겨우 역사시대로 들어섰다(전설적인 여러 왕 가운데서 유명한 갑골문 복사에 의해서 동시대적으로 확증되는 것은 왕국의 후반기. 은허 천도 후의 8왕뿐임). 이후 서주(西周)를 거쳐 춘추시대의 중엽까지이다. 그 기간은 전형적인 청동기 문명이나, 조형의 예술성에서는 선행의 은시대의 것이 후속의 주시대보다 오히려 뛰어났다. 주의 역사는 은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전설적으로 후세의 여러 전적(典籍)에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실증적 사료(史料)는 거의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서주 사회가, 원시 씨족공동체인 강점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된다.그러나 기원전 9세기 무렵부터 차츰 내부적 모순이 고조되어 쇠퇴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는 드디어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지 못하여 수도를 잃고 주나라 왕실은 동으로 달아나 겨우 명맥을 부지하였다(東周).
 
인도에서는 인도-유럽계 아리아인이 점차로 원주민과 혼혈해 가면서 또한 후자를 정복하면서 기원전 10세기까지에는 [[갠지스 강|갠지스강]] 방면으로 진출하고 전 7세기경에는 북인도의 여러 소국을 통합하여――전설에 의하면――16개 왕국이 성립했다고 한다. 다만 고대 초기의 인도에는 연대를 명백히 한 역사 기술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동안에 있었던 그들의 역사적 경과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스트 제도도 그 기원은 이즈음――처음에는 피정복 원주민에 대한 ‘색(色:파르나)’의 구별로서――정복형(征服型) 노예제도를 강행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이 노예적인 신분 질서(다르마)의 이데올로기화와 동시에 제1신분인 [[브라만 (카스트)|브라만]]의 지배 계급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은 [[브라만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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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중해 ===
시리아·팔레스티나 지방은 고도로 발전된 두 문명이 교차된 지역이며 또한 [[에게 문명]], 소아시아의 문명도 이 지방에 영향을 주었다. 이 지방은 남북으로 평행하게 뻗어 나간 두 개의 산맥, 즉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에 의해 시리아 사막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동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다.역사 시대에 접어들자 시리아·팔레스티나 연안의 여러 도시는 교통의 중심을 이루어 재빨리 초기 왕조와 교역을 시작하였다. 레바논 삼목(杉木)은 건축 재료로서 가장 우수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제국|아카드 왕조]]·[[우르 제3왕조]]·바빌론 제1왕조의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2000년대 초기의 오리엔트에 있어서의 민족 이동의 여파는 이 지방에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후르리·미탄니 왕국의 건설, [[힉소스]]의 침입, [[히타이트]]의 북시리아 지배, 그리고 이집트 신왕국의 시리아 진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이 지역은 항상 큰 나라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알라라크는 히타이트에 정복되었다.[[우가리트]]는 기원전 1370 기원전 1360년경에 있었던 대지진에 의해 멸망됐다. 이렇게 해서 아마르나 시대를 맞이한 이 지역은 이집트나 히타이트의 보호 아래 [[비블로스]] 등의 무역항(貿易港)으로 번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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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트 ===
아마루나 시대의 외교 관계 성립에 따라 오리엔트는 한동안 이집트를 중심으로 평화시대를 맞이했다.그러나 아람인의 시리아 침입, 필리스티네인의 팔레스티나 침입, 해상민족의 침입에 의한 [[히타이트]] 멸망, 미탄니의 멸망, 카시트의 멸망에 의하여 오리엔트엔 정치적 공백시대가 찾아왔다. 이집트는 해상민족을 격퇴시켰으나, [[이집트 제20왕조|제20왕조]]가 멸망된 후, 왕조 말기라고 할 수 있는 쇠퇴의 시대에 접어든다. [[이집트 제21왕조|제21왕조]]는 타니스를 중심으로 하이집트만을 영유하고, [[이집트 제22왕조|제22]]-[[이집트 제24왕조|24왕조]]에 가서는 원래 이집트의 용병(傭兵)이었던 리비아인이 파라오가 되고 [[이집트 제25왕조|제25왕조]]는 누비아 출신의 에티오피아인이 왕이 되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군사 국가 [[아시리아]]가 점점 대두하여 때때로 [[바빌로니아]]를 그 세력하에 두고, 북쪽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우라르투]]를 치고, 나중에는 시리아 북부 아람인의 소국가를 병합하여,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영토에 임하여, 레니키아인의 도시국가나 [[이스라엘 왕국]], [[유대 왕국]]에 위협을 가하였다.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아시리아는 제국시대에 들어가, 우라르투를 일시 복종시켜 다마스쿠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다시 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도시는 아시리아에 조공하였고, 다시 이집트는 기원전 670년 아시리아에 점령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란, 소아시아를 제외한 오리엔트 지방은 아시리아에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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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왕조 ===
[[File파일:British Museum Kang Hou Gui Top.jpg|thumb|left|초기 주의 제기]]
[[상나라|은 왕조]]에 이어 중국에 성립된 국가가 [[주나라|주 왕조]]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중원이란 황하(黃河) 중류의 남북 지역, 즉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의 대부분과 허베이(河北), 산시(陝西)의 일부이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일족 공신을 각지에 파견하고 제후의 벼슬을 주어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은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기원전 770년, 서방의 이민족 [[서융|견융]]의 침공을 받아 수도 [[풍호|호경]](鎬京)은 함락되고 부도(副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동천하였다.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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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걸쳐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흥망한다. 원주지(原住地)가 중동 지역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민족이 동부 지중해의 발칸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세기의 일이었지만 그들 특유의 도시국가가 완성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스 민족 가운데 [[도리아인]]은 반도의 남단에 있던 원주사회(原住社會) 미케네를 정복, [[스파르타]]라는 이름의 폴리스를 세웠고, 그 뒤에 이주해 온 [[이오니아 인|이오니아인]]은 중부 해안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건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 지중해를 무대로 가는 곳마다 식민도시를 건설한 아테네에서는 상·공 시민층이 일어나 대토지 소유자들의 귀족정치를 타도하고 가장 전형적인 고대 민주제를 완성하였다.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집정관 [[솔론]]이 일대 사회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노동 노예제가 발달하였고, 노예들은 참정권을 박탈당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 개혁으로 민주정치가 완성되고,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민주정치의 전성기가 다가왔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델로스 동맹을 결성, 밖으로 아테네 제국을 형성하고 안으로 민주정치를 더욱 견고하게 하여 이른바 페리클레스 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의 문화도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문학·미술·건축·철학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가장 그리스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 아테네는 30여 년 간에 걸친 스파르타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 뒤에는 스파르타가 패권을 장악하지만 얼마 못 가서 [[테베 (그리스)|테베]]에 그 패권을 넘겨주어 마침내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폴리스와 폴리스의 싸움이 만성화되는 사태하에서 폴리스는 쇠퇴하였다.
 
한편 이 시기의 중국은 대략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중기에 해당한다. 춘추시대 후기에는 남방의 [[초 (춘추 전국)|초]](楚)·[[오 (춘추)|오]](吳)·[[월 (춘추 전국)|월]](越) 제후국이 [[황하]] 유역의 중원(中原) 제국에 침입하여 혼란이 야기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위 (춘추 전국)|위]](魏)·[[진 (영성)|진]](秦)·[[제 (춘추 전국)|제]](齊)·[[연 (춘추 전국)|연]](燕)·[[초 (춘추 전국)|초]](楚)·[[한 (전국)|한]](韓)·[[조 (춘추)|조]](趙)의 [[전국 칠웅|7강국]]을 중심으로 대세가 좌우되었다.정치사적인 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는 주(周) 왕실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봉건 제후국이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이 제후국 중 약소국은 강대국에 병합되어 갔다. 한편 제후국 내부에는 제후 가(家)의 세력이 약화되고 가신(家臣)이 실권을 장악하는 하극상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곧 전대 이래의 씨족적 질서가 붕괴되고 더 규모가 작은 가족 단위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또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종래의 생산 방법이 새로이 발전된 생산력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변화에 기인한다. 기원전 6세기경 중국은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의 단계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이후의 농구(農具)는 철제로 바뀌어진다. 철제 농구의 사용은 광산 개발, 철기 제작의 수공업 성립, 철기 판매 상인의 출현을 전제로 하는데, 농업 능률의 증대나 토지 개척에 대한 사료(史料)는 많이 있다. 또 이 시기에는 황하 유역의 제·조·위와 [[양쯔강]] 유역의 오에서 치수·관개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제방 및 운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대사업을 위해서는 강대한 정치권력이 요구되었고, 동시에 이런 대사업의 실행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했다. 사실 기원전 4세기 이후의 전국시대 7강국은 이 때부터 중앙집권 제도로 가고 있었다.이러한 변혁에 따라서 토지의 사유화와 조세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군사 및 관료제도가 중앙 집권화하였다. 당시의 변혁으로 대표적인 것은 상앙에 의한 개혁이다. 상술한 변혁은 기원전 3세기 말에 중국을 통일한 진의 중앙집권제 성립과 진한(秦漢) 사회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경제면에서의 급격한 변화는 관념 형태에도 많은 발전을 초래하여 이 시기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에 의한 찬란한 문화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 인도에는 16개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16왕국 중 2대국이 나타나 정치적·군사적으로 다른 왕국을 압도해 갔다.기원전 5세기경 인도는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 [[카스트제]](制)가 무너지고 한편으로 물질적 생활이 풍부해지자 도덕적 퇴폐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여기서 종래의 브라만교는 종래의 권위를 상실하고 이에 대체해서 석가가 [[불교]]를 성립시켰다. 불교는 카스트제를 타파하려는 신흥상인, 수공업자의 경제적 원조를 받고 이어서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왕의 보호하에서 급격히 제국에 파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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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멸망(전 712) 후 4강대국이 분립 상태를 계속해 왔던 오리엔트 세계에 또다시 통일을 가져온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기원전 553년이란 고원의 파르사 지방에서 군병을 일으킨 [[키루스 2세]]는 메디아(전 550), 리디아(전547), 신바빌로니아(전539)의 3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속해서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캄비세스]]는 이집트(전 525)를 병합하여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완성시켰다. 페르시아의 정복이 극히 짧은 기간에 더구나 매우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페르시아의 우수한 군사력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그 외에도 그들의 교묘한 외교나 피압박민에 대한 관대한 정책, 그리고 오리엔트 강대국 내부의 지배 계급간 대립 등도 그 요인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캄비세스의 죽음으로부터 [[다리우스 1세]](다레이오스 1세)의 초두까지 제국(帝國)에 분열과 혼란이 일어났지만, 다리우스 1세는 이를 잘 진압하여 통일을 회복했다. 그는 제국의 재조직에 착수하여 그 후 약 2세기에 걸치는 제국 지배의 기초를 쌓았다. 그의 시대에 제국 영토는 최대에 달했으며, 동쪽은 중앙아시아, 인더스강 유역에서부터 서쪽은 마케도니아,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광대한 영역을 언제까지나 통일해서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페르시아 전쟁 중에 이집트와 바빌론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이집트는 그 후도 때때로 페르시아에 반항하여 일시적으로 독립을 실현했다. 아르탁세륵세스 2세(Artaxerxes Ⅱ) 시대는 왕제(王弟) 키루스와의 다툼, 이어서 [[태수 (페르시아)|사트라프]]의 대반란이 일어나 서쪽 여러 주의 분리 경향이 현저해졌다. 그 후에도 사트라프의 반란은 그치지 않고, 또 궁정 음모 때문에 정치는 문란해지고, [[다리우스 3세]] 때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 그리스군에 패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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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로스 동맹 ====
{{본문|델로스 동맹}}
[[File파일:The Parthenon in Athens.jpg|thumb|left|아테네의 패권이 절정에 달한 때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할 것을 명분으로 하여 기원전 477년의 봄, [[고대 아테네|아테네]]를 맹주로 [[이오니아]]나 [[아이올리스]], [[에게해]]의 여러 섬에 있는 폴리스가 가맹하여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가맹 각국은 군함과 수병을 제공하든가 공부금(貢賦金)으로 대납하든가 하는 의무를 졌다. 많은 가맹국은 안일을 구하여 후자를 택했으므로 결국 아테네가 이들 동맹군 자금을 사용하여 군비를 부담하여 아테네의 무력은 한층 더 강대해졌다. 공부금의 사정이나 징수하는 ‘동맹 재무위원’이 아테네 시민에서만 선출하도록 되어 있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원래 아테네가 주도하는 체제였지만 처음에는 명칭대로 에게해 중앙의 델로스섬에 있던 동맹금고를 기원전 454년에 아테네에 옮기고서는 아테네는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사유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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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스의 쇠퇴 ====
{{본문|펠로폰네소스 전쟁}}
[[File파일:Helmed Hoplite Sparta.JPG|left|thumb|[[호플리테스]], 스파르타, 5세기 초|261x261픽셀]]
기원전 431년, 이제까지 대립만을 지켜오던 아테네 맹주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맹주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어났다. 아테네는 개전했을 때 우세했으면서도 2년 후 페스트가 유행하고, 유능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잃어 전세가 역전되었다. 아테네는 국부적인 승리에 따라 강화를 맺을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모두 놓쳤으며,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하였다. 폴리스 세계의 정정(政情) 불안과 모든 모순이 일시에 드러나서 또다시 전쟁을 초래었으며, [[에파메이논다스]]의 새로운 전법에 의한 밀집 진형이 효과를 발휘하여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레우크트라의 일전]]으로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 (그리스)|테베]]로 옮겨졌다.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스파르타는 자기 함대의 급양 자금을 페르시아에서 원조받는(기원전 412년 여름의 원조조약), 그리스 민족에 대한 배반 행위를 하면서 전쟁을 했는데, 폴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에 의해 얕보여 이 때부터 금력에 의한 페르시아의 내란 개입이라는 간단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전란에 의한 토지의 황폐와 집중, 중산 시민의 몰락, 끝없는 정쟁과 망명의 반복――이들은 폴리스의 시민사회를 근저로부터 파헤쳐버려 시민군(市民軍)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지만――이와 같은 사태는 따로 [[임금 (경제학)|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용병]]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크세노폰)|아나바시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필요에 따라 어느 곳에서나 싸웠으며, 페르시아의 왕이나 [[사트라프]]에게도 사용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페르시아로서는 폴리스 세계의 분열 항쟁만이 목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스파르타와 통하고, 동시에 아테네, 테베를 원조하여  예를 들면 코린트 전쟁과 같은 폴리스 사이의 전란을 조장하고, 그 결과인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안탈키다스 화평 조약]]’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대왕의 칙명에 그리스인끼리의 전투가 정전되는 식의 어이없는 종말이 되었다. 그 결과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는 완전히 페르시아 영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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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
[[파일:Ancient india.png|right|thumb|300px|기원전 600년 경의 십육대국]]
기원전 7세기경 갠지스강 유역에는 크고 작은 도시국가가 난립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가 되자 군주제를 발달시킨 [[코살라]]와 [[마가다]]의 양국이 강대하게 되어 인근의 나라들을 병합해 갔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 초부터 양국은 심한 싸움을 되풀이했으나, 결국 마가다가 승리하여 갠지스강 유역 일대의 통일을 실현시켜 그뒤 몇세기에 걸쳐 북인도의 역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이 지방의 정치적 사건은 서사시(敍事詩) 외에도 불교나 자이나교의 경전(經典)을 통해 상당히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사상면에서는, 브라만교의 제식 중심적인 생활 방식에 반대하고 내면적인 사색을 중시하는 일파에 의하여 [[우파니샤드]] 철학이 나와, 후대 인도 사상사의 전개를 규정지어 주었다. 당시 갠지스강 유역의 도시국가에서 활약하고 있던 것은 무사계급(크샤트리아)과 상인계급(바이샤)이었다. 그들은 베다나 브라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카스트 제도에 구애됨이 없이 행동했다.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가 있는 여러 도시에서 새로운 사상가들이 모여 자기 사상을 설유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들은 불교 경전에 [[62견]], 6사외도(六師外道)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사상가 중에서도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와 바르다마나([[마하비라]])가 유력하고, 그들이 창시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후의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불교와 자이나교의 발달로 크샤트리아 계급의 지위는 높아져 인도 사회는 크게 변천하게 되었다. 특히 불교의 평등사상을 정치에 적용시킨 것은 [[마우리아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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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 시대 ====
[[파일:Chunqiu_map-zh-classical.png|섬네일|384x384픽셀|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
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동천(東遷)하고 나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이지만, 그 전반기를 [[춘추시대]](전 770 전 403)라 하고 후반기를 [[전국시대]]라 한다. 주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벌써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 가까이나 되던 국가는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전 651),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전 632)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전 597)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초의 장(莊)왕은 주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춘추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 전국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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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제후는 왕을 칭하게 되어 이 때에 명실공히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주의 봉건제는 붕괴되었다.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는 7개 강대국의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으며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서 비로소 진·초·연·제·한·위·조의 [[전국 칠웅|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어졌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현시키게 된 것이다.
 
요컨대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將軍)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서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군주권(君主權)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官僚軍)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하여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영지(領地)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부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몇몇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通關稅)를 필요로 하는 국경(國境)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국경이 없는 중국의 통일을 이면에서 촉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이와 같은 것은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립한 강국이 대립·항쟁하는 반면에 있어서는 문화, 경제의 면에서 이미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 기원전 3세기-기원전 1세기 ==
기원전의 마지막 3세기(전 3세기-전 1세기) 간은, 이미 통일을 이룩한 오리엔트 세계에 이어서 구대륙의 다른 지역에 있어서도 잇따라 대통일 국가의 성립이 있었던 시기이다. 또한 그 동안에 전개된 대규모의 정복 전쟁과 거대한 국가의 출현은, 각 지역에 있어서 사회의 현저한 변동과 새로운 체제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또한 그에 수반하여 통상로(通商路)는 더욱 확대되어 고대 세계의 넓은 범위에 걸쳐서 왕성하게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서방에 있어서는 기원전 4세기 후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대신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나타나, 동지중해에서 서아시아까지를 지배하였으나, 대왕의 사후 그 제국은 이른바 ‘후계자’들에 의해서 분할되어,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프톨레메우스 왕조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헬레니즘 국가들이 성립하였다.
 
이후 3세기에 걸친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인의 식민과 도시의 건설이 진척되고, 또한 그 도시간의 교역이 성행하여 노예제 경제는 더욱 발전하였다. 노예제 경제의 진전은 폴리스의 자립성을 상실시켜 가일층 광대한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었으나, 오리엔트의 전제정치를 받아들여 도시를 광역국가(廣域國家) 체제하에 흡수한 헬레니즘 국가의 출현은, 이 시대의 동향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제국가도 기원전 1세기에는 더욱 커다란 조직체, 지중해 전체를 하나로 묶는 로마제국으로 통합되어갔던 것이다.동지중해 세계에서 헬레니즘 여러 국가가 분립 상태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로마는 서지중해에서 과두귀족정(寡頭貴族政)의 상업 국가 카르타고와 1세기 이상에 걸친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 로마는 재빨리 동지중해에의 진출을 개시하였고,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타도한 기원전 146년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병합했다. 그 후도 로마 군대는 동방 정복을 계속, 기원전 1세기 전반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후반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멸망시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을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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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
{{본문|고대 로마}}
[[File파일:Vexilloid of the Roman Empire.svg|thumb|150px|left|[[SPQR]]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하며,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였다.]]
기원전 6세기 말 왕을 에트루리아로 쫓아버린 로마 귀족들은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귀족 지배는 평민의 투쟁에 의해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었지만, 원로원의 지도하에 타협하여 결국은 귀족 지배를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밖으로 눈을 돌리면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으며, 또 아펜니노 산맥의 아에퀴인, 볼스키인의 평지 진출도 격심하였다. 기원전 5세기의 로마는 방어전에 힘쓰다가 5세기 말에 이르러 공세로 전환했으나 그 직후 갈리아인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칼리아인으로부터의 타격과 신분 투쟁을 수습하게 되자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라티움의 도시들과 싸워 이들을 굴복시켰으나 단순한 종속은 아니었다. 로마가 삼니움, 에트루리아, 남이탈리아에 세력을 확장할 때 라티움의 도시들이 공동 출병하고, 정복한 도시들로부터 빼앗은 영역에, 역시 공동으로 ‘라틴인 식민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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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정 ====
{{본문|로마 제국}}
[[File파일:Roman Empire Trajan 117AD.png|thumb|300px|117년의 로마 영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후에, 속주에서의 반란, 이탈리아의 노예 반란, 동맹시 전쟁(전 91-전 88) 등 로마의 계속되는 위기는, 자비로 군대를 편성한 유력자들에 의해 극복되었으나 그들의 군사력은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국내로까지 향하였다. 정계의 대립이 무력으로 해결하게 되어 내란의 위험은 오히려 강해진 한편 지금까지 국정을 담당했던 특권적 지배층은 국가의 이익보다도 그 특권을 중시하는 보수 세력인 [[옵티마테스|벌족파]]가 되고 있었다. 실력자들도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피하고, 민중파가 되어 국가 제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민회의 결의를 무기로 벌족파에 대항하였다. [[종신 독재관]]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는 공화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나, 그 정책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고 로마에 개선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주장해 온 ‘공화정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내란 평정을 위한 전권을 반납하고, 원로원에서 첫째 자리인 프린켑스(Princeps)의 지위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하는 칭호를 받았을 뿐 표면상으로는 [[집정관]]에 연속 취임하는 것까지 사퇴했다. [[호민관]]에는 취임하지 않았으나, 호민관의 직권을 얻어서 민회에서의 입법을 지배하고. 마찬가지로 프로콘술(Proconsul, 대리 집정관)의 직권에 의해서 많은 속주를 관리하였다. 이만한 권력 집중도 결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덕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수도의 근위병 9천 명, 속주군 30만 명을 움직였고, 또한 그가 관리하는 속주로부터의 수입을 국고(國庫)가 아닌 원수금고(元首金庫)에 넣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가 존속한 것은 종래의 특권을 인정하여 노빌레스(Nobile)를, 최대 규모의 식민으로 병사를, 실무에서의 수입으로 [[에퀴테스]](Equites)를, 그리고 평화로 모든 사람들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1세기에서 3세기는 아우구스투스의 지배에서 [[오현제|5현제]](五賢帝)에 이르는 시기로, 로마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불리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동안에 제국 내의 평화는 최대로 유지되었고, 로마식 도시가 건설되어 속주(의 로마화가 추진되었으며,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경제적 통일이 달성되어 여기에 로마의 세계 시민 정신이 출현하였다. 한편 이 시대는 또한 노예의 공급이 대체로 한계에 달하여 차츰 감소되었고, 그 위에 빈번한 노예 반란으로 인하여 노예제 농업을 시행함에 있어 많은 난관이 드러났다. 2세기 후반, 5현제 최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이래 이민족과의 전쟁을 위한 군사력 강화의 결과로 각지의 군단 세력이 증대하여, 3세기에 50년간에 걸쳐 [[군인 황제 시대|군인 황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분치제(分治制)에 의해 유력자의 내분을 막고, 갈리아의 바가우다에의 난,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다뉴브·라인 방면, 페르시아 전선의 수비를 견고히 하고, 제국의 새로운 편성에 착수했다. 전국의 12관구 밑에 속주를 두고, 각 속주에 총독과 군사령관을 파견하고, 72개의 군단은, 현지에 정착하는 변방군과 전제군주 직속의 야전군으로 재편하였다. 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코로누스(직접 경작자)의 이주를 금하고, 세금징수원인 참사회원을 세습제로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누수(전제군주)로서 제국을 재건하였고, 그리하여 절대 권력자가 인민을 신하로 지배하는 도미나스(전제 군주정)가 제국의 체제로 되었다.
 
한편 기원 1세기에 유대교로부터 분리, 생성한 그리스도교는 [[사도]](使徒)들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297년의 마니교 금지에 이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명령했다. 그것은 전통적 다신교에 의해 제국 국민의 정신적 결속을 시도한 것인데, 이미 제국에 뿌리박은 그리스도교에의 결정적 타격은 되지 못하여, 박해정책의 추진자인 [[갈레리우스]] 자신이 311년 조건부 관용령을 내리고 다시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전면적인 관용령인 [[밀라노 칙령]]을 내려 신앙과 교단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도의 복권, 몰수 재산의 반환을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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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식민국가 [[박트리아]] 왕국의 세력은 한때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서북 인도 일대에 미쳤지만, 분열에 의해 약화되어 기원전 139년경 스키타이계(系) 여러 부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그 후 박트리아 지역에는 [[대하 (국가)|대하국]]이 성립했지만, 이 대하는 곧 흉노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동한 대월지에 의해 멸망하고, 대월지는 거기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을 전후해서 대월지 영토 내에 5제후(五諸侯)의 하나인 쿠샨(貴霜)족이 강성해져 대월지를 뒤엎고 힌두쿠시 산맥의 남북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다. [[쿠샨 왕조]]는 2세기 중엽의 [[카니슈카]] 왕 시대가 가장 번창했으며, 도읍 프르샤푸라가 있는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그 지배 영역은 북쪽으로는 동투르키스탄, 남쪽으로는 갠지스강(江) 중부 유역 그리고 데칸 북부까지 뻗어 갔다.
 
쿠샨 제국이 번영한 가장 큰 원인은 이 제국이 동서 무역로의 중앙에 점하기 있었던 때문이다. 또 동서 문화의 교류 지점이기도 한 이 지방은 쿠샨 시대에는 대승불교가 확립되고 간다라 미술이 번영했다.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한 농경사회(農耕社會)는 카스트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도적 농경사회는 점차 인도 전체에 확대되었다. 인도인의 생활 전반을 카스트 제도에 따라 규정한 《[[마누 법전]]》이 성립한 것은 기원전 200 기원후 200년경까지이다.
 
[[마우리아 왕조|마우리아 제국]]의 판도에 들어간 남(南)인도는, 북방 선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크게 진보했다. 마우리아 제국 쇠퇴 후, 이 지방 주민은 북인도에 있어서의 여러 왕국의 흥망과는 별로 관계없이 국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인도 여러 나라 중에서, 데칸 지방에서 일어난 [[사타바하나 왕조]](안드라 왕조)은 반도의 동서 항구를 거점으로 한 해상 무역으로 번영했다. 특히 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보석·향료 등과 교환하여 로마의 금화나 유리 제품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국내에서는 브라만가 왕실 보호하에 번영했다. 한편 불교의 신앙도 성해서 영내에는 아마라바티를 비롯해서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안드라 왕국의 남쪽에는 촐라, 체라(케랄라), 판드야라는 드라비다계의 3왕국이 수세기에 걸쳐 번영했다.
 
=== 중국 ===
[[왕망]](王莽) 말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실(漢室)의 혈통을 이은 남양(南陽:허난성 남부)의 호족 유수(劉秀)는, 남양과 하북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적미(赤眉) 등의 농민 반란군이나 다른 호족군을 진압하고 25년 [[뤄양 시|뤄양]]에 도읍을 정하여 제위에 올라, [[후한 광무제|광무제]](光武帝), 한제국(漢帝國)의 부활을 선언했다. 광무제는 전한의 여러 제도를 규범으로 하여 내정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정국의 안정을 회복했다. 남(南)흉노를 예속시키고, 동북의 오환(烏桓)·선비(鮮卑)에 대한 방위를 굳히고, 남쪽의 여러 민족을 평정하였으며, 서쪽의 강(羌)족을 쳤다.후한은 4대 화제(和帝) 때까지는 국력이 충실하여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을 복종시켜서 동서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서 유약(幼弱)한 황제가 계속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정에서의 환관(宦官)·외척(外戚)의 힘이 강해졌고, 특히 유가적 교양을 갖춘 청류기절(淸流氣節)의 학자들이 이에 대항하는 등, 국가 중추부에 있어서의 통일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국가는 일반 농민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기능을 잃어갔다. 또한 각지의 호적들은 전한(前漢)에 비해 더욱 토지 겸병(兼倂)을 심하게 하여 일반 농민을 압박했다.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 농민들 사이에는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의 주술적(呪術的) 민간신앙이 침투하여 마침내 184년에는 이들 종교에 의해서 단결한 농민들에 의한 [[황건의 난]]이 일어났다.이 주류 세력은 그해 안에 평정되었지만, 이후 각지의 지방관리·호족들은 제각기 무장 자립하여, 후한제국은 와해의 징조를 더해 갔다. 이러한 때에 황건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조조]](曹操)는, 한실을 옹호하여 화북을 누르고 위왕(魏王)에 봉해져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에 헌제(獻帝)를 위협하여 선양(禪讓)을 받았고, 이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위(魏)·오(吳)·촉(蜀)이 정립(鼎立)하는 [[삼국 시대 (중국)|3국시대]]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