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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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File파일:Bayern um 788.png|thumb|right|바이에른]]
 
카를로만은 [[828년]] 또는 [[820년]] 무렵 [[바이에른]]의 왕인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왕 루트비히]]와 [[아르톨프]] [[백작]]의 [[구엘프 1세]]의 딸 [[바이에른]]의 [[바이에른의 엠므|엠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져있지 않다. 카를로만에게는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동프랑크의 소 루트비히]]와 비만왕 [[카를 3세]] 등의 형제들이 태어났다. 배다른 삼촌이기도 한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는 그의 이복 삼촌이면서 어머니 쪽으로는 이종사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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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른텐 공작과 바이에른의 왕 ===
[[File파일:Carolingian empire 876.svg|thumb|right|250px|[[876년]] 무렵의 [[프랑크 왕국]]의 영토, 붉은 색은 대머리왕 [[카를 2세]], 분홍색은 뚱보왕 [[카를 3세]], 녹색은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소루트비히]]의 영토이고, 보라색이 [[876년]] 당시 카를만의 영토였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그의 동생들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소 루트비히]]와 [[카를 3세|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아버지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독일인 왕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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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왕 ===
[[File파일:Corona ferrea.png|thumb|left|200px|[[롬바르디아의 철제 왕관]]]]
 
황제 루트비히 2세는 죽을 때 유언으로 카를만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지만, 대머리왕 카를이 그가 받을 자리를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876년]] 독일왕 루트비히는 다시 카를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죽었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6r2474a 루트비히 2세 - Daum 백과사전<!-- 봇이 붙인 제목 -->]</ref> 카를만은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 사후 바로 [[이탈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카사우리아]]의 [[산 클레멘테]]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카를 2세]]는 이탈리아에 금과 은과 보석에 큰 금액의 돈으로 교황을 매수했다고 한다. 바로 대머리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제관을 차지했다. 카를만은 자신이 정당한 [[이탈리아의 왕]]임을 선언하고 카를이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위를 약탈했다고 선언했다. 이후 카를만은 로트링겐, 서프랑크와 이탈리아를 공격하였다. 카를만은 교황청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각 지역별 주교구 주교들의 관할과 권한을 확장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