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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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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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書, {{llang|he|ספר ישעיהו|예샤으야후}}, {{llang|el|Ἠσαΐας|헤사야스}}, {{llang|en|Book of Isaiah}})는 흔히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히브리 성서의 한 책이자, 기독교 [[구약성서]]의 23번째 책으로, 총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통적으로 이사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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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사야는 '여성 예언자'(이사야 8:3)라고 불리는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그녀가 그렇게 불렸던 것은 사사 [[드보라]] (삿 4:4), 그리고 여선지자 [[훌다]](왕하 22:14-20)와 같이 야웨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預言)'을 했거나, 혹은 단순히 그녀가 '예언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사 38:1).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은 모두 상징적이었다(사 8:18). 한 아들은 '스알야숩(Shear-jashub)' 즉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7:3)였고, 다른 아들은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h-baz)' 즉 '그가 잡은 먹이가 빨리 부패함' 혹은 '파멸이 임박했다'(8:1-4)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이사야의 신상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 이사야의 저작 문제 ===
====저자====
"이사야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하여는 [[기원전 8세기]] 어간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의 저작이라는 입장이 역사-비평적 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전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여파로 성서를 고문헌으로 이해하는 비평적 성서읽기가 생각되면서, 이사야 외에 제2 이사야 및 제3 이사야라는 학설이 즉,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를 복수로 보는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 [[1775년]] [[되덜라인]](J. C. Döderlein)은 그의 "이사야"란 (''Esaias'') 저작에서 이사야서는 두 개의 다른 작품들의 합성이라 주장하고, [[아이히혼]](J. G. Eichhorn)은 "구약 서론"이란 책에서(Eichhorn, 1780-1783) 사 40-66장은 이사야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사야서에 대한 비평적 가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의 이사야서 주석(Das Buch Jesaja, 1872)이었다.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원-이사야서 (Proto-Isaiah), 제2 이사야서 (40-55장), 제3 이사야서 (56-66장) 등으로 구분되는데, 소위 제2 이사야서는 [[기원전 538년]] [[바벨론]]에 거주하던 추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떤 무명의 예언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소위 제3 이사야서는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어떤 무명의 또 다른 예언자가 기록한 책이며, 소위 원-이사야서는 [[기원전 2세기]] [[마카비]] 시대까지도 계속 진화 중에 있던 가장 늦게 산출된 문헌이라 한다.
====베른하르트 둠====
[[베른하르트 둠]]의 삼구분설 비평 가설이 비평학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분은 어휘 상의 차이, 문체상의 차이, 신학 사상의 차이 등에 근거한다고 한다. 특히 소위 제2 이사야서에는 심판 이후의 회복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소위 제3 이사야서에서도 회복 주제가 부각되지만,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심판 메시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회복의 메시지는 둠이 원-이사야서라 부른 1-39장에서도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메시지에서 (사 13-14장) 추방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사 14:1 이하).
[[
이사야서 후반부를 추방 이후의 저작이라 가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대왕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 44:28, 45:1 등).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는 고레스라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이름을 떨치던 시기에 기록되었으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고레스"라는 왕의 이름은 예언으로 알려졌을 수 있으며 ("요시야"란 이름이 왕상 13:2에서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예언으로 선포되는 점을 참조),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 메시지도 예수나 사도들이 가졌던 입장처럼 (마 3:3, 4:14, 8:17, 행 8:30 등),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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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및 구조 ==
이사야서는 구약의 다른 몇 권의 책들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의 첫 부분은 이스라엘에 임박한 심판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사 1-12), 다음 장들에는 이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판에 초점을 맞춘 내용들이 나오고 있다(사 13-35).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미래의 축복을 기술하고 있다(사 40-66). 36-39장은 본문의 관심이 앗시리아에 의한 위기로부터 포로시대 및 그 이후 시대의 관심사들로 바뀌는 전환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슷한 구조는 에스겔서, 스바냐서, 요엘서, 예레미야서의 본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예언 전집이라고 부를 만하다. 예언자 이사야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이사야>의 첫 부분(1-39장)뿐인 듯하다. 이사야의 활동 초기에 대한 내용은 6장 1절부터 9장7절까지에 나오고, 말기에 대해서는 22장, 28-32장, 36-39장(서기전 701년 예루살렘의 포위)에서 다룬다. 그 중간 시기에 속하는 것이 1-5장, 9장 8절부터 12장 6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진술이다. 다른 여러 부분은 그 시기와 저자를 확실히 알아낼 수 없다. 13-23장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을 담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만 이사야와 관련시킬 수 있다. 24-27장은 세상 끝에 관한 묵시문학적인 본문인데 그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33-35장이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거의 알 수가 없다. 36-39장의 이사야 이야기는 대부분 글자 그대로 열왕기하 18-20장과 일치한다.
40-55장의 사고는 1-39장의 여기 저기서 나타났던 회복 메시지와 유사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유다 사람들을 포로 생활에서 해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과 예루살렘이 재건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56:9--59장은 1-39장 여기 저기 선포되었던 심판 메시지와 유사하며, 60-66장은 추방에서의 귀환과 그 이후의 영광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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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말씀 ||align="right"|1-12장
| 책망하시며 호출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예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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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 ||13-23장
| rowspan=2 | 여호와를 교만한 열방을 파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
| 하나님의 열방에 대한 심판 ||24-27장
|-
|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말씀 ||28-39장
| 사악한 자에게 임할 일련의 화를 선포하면서 심판 주제를 계속해 나간다.
|-
| 바벨론 포로에 대한 위로의 말씀 ||40-55장
|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희망은 계속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 종말에 대한 소망의 말씀 ||56-66장
|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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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흔히 [[예수]]를 구약성서에서 탄생과 대속적 수난을 예고한 분이라는 그리스도론의 성서적 근거로 인용되지만, [[예언자]] 전통에 따라 [[사회적 정의]](social-justice)를 주장한 사회적 [[예언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 야훼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요, 제련작업으로 불순물이 제거되어야 할 [[은]]이라고 부른다.
{{인용문2|9.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10.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16.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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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메시지의 해석 방법론 ==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는 심판 메시지와 함께 이사야서를 구성하는 큰 요소이며, 다른 요소는 내러티브 문체로 제시된 역사 기술이다 (사 7-8장, 36-39장). 이사야서를 해석하고자 할 때, 역사비평적 접근법은 이사야서의 생성과 발전을 추적하는 데 정력을 소진시켰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날에는 이사야서의 현재 모습에서 메시지를 찾고자 시도한다. 이는 브리바드 차일즈의 정경비평이나 신 문학 비평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이런 현재적 경향에서 이사야서 해석에 중요한 열쇠는 내러티브로 제시된 부분들이 그렇지 아니한 부분들과 갖는 사고면에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믿음을 대조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믿음의 모델이 누구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엄청난 위기의 스트레스에 처하여 기도와 이사야 선지자의 영적 권세에 의지하여 국가와 개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듣는 성도는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그분을 앙모하라." 이것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사야 후반부에서 특히 부각되는 이스라엘의 추방에서의 귀환과 그 이후의 찬란한 영광은 이사야의 장엄한 예언의 절정이며, 그 예언의 규모나 아름다움은 여타 선지자의 그것을 월등하게 능가하고 있다. 그가 선포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영광은 고난 받는 야웨의 종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야웨의 종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둠에 의하면 그 야웨의 종은 율법을 가르치는 예언 교사를 지칭한다. 반면 젤린은 [[1898년]]에는 [[스룹바벨]]을, [[1901년]]에는 [[여호야긴]]을, [[1922년]]에는 [[모세]]를 지칭한 것이라고 입장을 몇 번이나 바꾸어 주장했다. [[1921년]] [[모빙켈]]은 말하길, 그 종은 다름 아닌 선지자 자신이라 했다(Balla, Gunkel, Haller, Hans Schmidt, Begrich 등이 동의했다). 그러다가 [[1930년]] 젤린은 입장을 다시 바꾸어, 제1-3 야웨의 종의 노래들은 제2 선지자가 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제4 노래는 그의 제자 제3 이사야가 스승에 대한 애가를 부른 것이라 했다. 모빙켈도 이에 질세라 자기 입장을 바꾸어 [[1931년]]에는 야웨 종들의 노래들은 제2 이사야의 제자들 집단에서 유래했으며,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관한 견해가 변화되었다고 했다. 즉 제2 이사야는 고레스가 구원을 가져 오는 자라고 보았다면, 그의 제자들은 이런 견해에 불만을 느끼고, 보다 영적인 야웨의 종을 기대하여 제2 이사야의 고레스 노래들을(44:24-48:22) 모방하여 종의 노래들을 작사했다 한다. ▼
이런 비평가들의 이해는 신약의 해석과 상충한다. 신약은 야웨의 종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막 10:45, 행 8:30 이하). 기독교 신학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야웨의 고난받는 종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는 대속의 원리는 레위기가 제시하는 짐승 제사로 그림처럼 조명되는데, 히브리서는 그 짐승 제사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
▲이사야 후반부에서 특히 부각되는 이스라엘의 추방에서의 귀환과 그 이후의 찬란한 영광은 이사야의 장엄한 예언의 절정이며, 그 예언의 규모나 아름다움은 여타 선지자의 그것을 월등하게 능가하고 있다. 그가 선포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영광은 고난 받는 야웨의 종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야웨의 종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둠에 의하면 그 야웨의 종은 율법을 가르치는 예언 교사를 지칭한다. 반면 젤린은 [[1898년]]에는 [[스룹바벨]]을, [[1901년]]에는 [[여호야긴]]을, [[1922년]]에는 [[모세]]를 지칭한 것이라고 입장을 몇 번이나 바꾸어 주장했다. [[1921년]] [[모빙켈]]은 말하길, 그 종은 다름 아닌 선지자 자신이라 했다(Balla, Gunkel, Haller, Hans Schmidt, Begrich 등이 동의했다). 그러다가 [[1930년]] 젤린은 입장을 다시 바꾸어, 제1-3 야웨의 종의 노래들은 제2 선지자가 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제4 노래는 그의 제자 제3 이사야가 스승에 대한 애가를 부른 것이라 했다. 모빙켈도 이에 질세라 자기 입장을 바꾸어 [[1931년]]에는 야웨 종들의 노래들은 제2 이사야의 제자들 집단에서 유래했으며,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관한 견해가 변화되었다고 했다. 즉 제2 이사야는 고레스가 구원을 가져 오는 자라고 보았다면, 그의 제자들은 이런 견해에 불만을 느끼고, 보다 영적인 야웨의 종을 기대하여 제2 이사야의 고레스 노래들을(44:24-48:22) 모방하여 종의 노래들을 작사했다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으로 선포된 (예컨대, 사 11-12장, 35장, 42장, 49, 53장 등을 참조) 이스라엘 회복 사건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런 성취는 사실 이사야가 바라 본 그 찬란한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고, 더구나 스가랴 같이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또 재건을 보았던 선지자까지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래적 사건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정도로 이사야가 바라 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게 한다. ▼
▲이런 비평가들의 이해는 신약의 해석과 상충한다. 신약은 야웨의 종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막 10:45, 행 8:30 이하). 기독교 신학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야웨의 고난받는 종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는 대속의 원리는 레위기가 제시하는 짐승 제사로 그림처럼 조명되는데, 히브리서는 그 짐승 제사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이사야가 선포한 회복 메시지의 영적 비밀이 놓인다. 비록 이사야가 그 당대의 유대인적 색채로 예언을 선포했지만, 그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바울 사도께서 롬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사야 후반부 특히 65-66장의 사고에 크게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사도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개괄하면서 남은 자의 원리, 선택된 자만 구원된다는 구원사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는 이방인의 영입과 유대인의 남은 자 구원의 원리는 바로 사 65-66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호세아서나 기타 구절들도 활용하지만,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만큼 크게 그의 생각을 움직인 것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으로 선포된 (예컨대, 사 11-12장, 35장, 42장, 49, 53장 등을 참조) 이스라엘 회복 사건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런 성취는 사실 이사야가 바라 본 그 찬란한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고, 더구나 스가랴 같이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또 재건을 보았던 선지자까지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래적 사건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정도로 이사야가 바라 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게 한다.
▲여기에 이사야가 선포한 회복 메시지의 영적 비밀이 놓인다. 비록 이사야가 그 당대의 유대인적 색채로 예언을 선포했지만, 그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바울 사도께서 롬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사야 후반부 특히 65-66장의 사고에 크게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사도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개괄하면서 남은 자의 원리, 선택된 자만 구원된다는 구원사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는 이방인의 영입과 유대인의 남은 자 구원의 원리는 바로 사 65-66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호세아서나 기타 구절들도 활용하지만,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만큼 크게 그의 생각을 움직인 것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혹자는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가 가정된 지상 천년왕국 기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리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천년왕국]] 사고는 그리스도께서나 사도들이 모두 선포했던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고에 상충되는 것이며, 이미 그분의 나라는 성령님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가 끝나고 임한 성취의 시대를 괄호시대로 무시하면서 주님이 재림 하신 후에 문자적인 천년 왕국 시대를 통해 구약이 성취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신약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절단시켜 버리는 비성경적 가정이라 보인다. 요컨대,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 교회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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