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틴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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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윌리엄 틴들은 1494년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151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1515년 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1519년 케임브리지로 옮겼다. 성경 연구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발견한 틴데일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영국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가장 진기한 보석, 지상에 남아 있는 가장 거룩한 유물이며, 신앙의 안내자요 지침서"라고 주장하였다.
 
틴데일은 성경 지식을 보급함으로 종교개혁이 가능하다고 믿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성경을 번역하거나 일반인들이 읽는 것은 로마 교황청이 엄격히 금하는 일로 붙잡힐 경우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틴들은 이러한 박해와 체포 위협 속에서도 유럽 대륙을 떠돌며, 라틴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 의한 번역 작업을 계속해 1526년 영어 신약성서를 완성하고 독일에서 인쇄해 영국으로 보냈다. 틴들은 그 후에도 구약성서 번역 작업을 계속했지만, 1535년 네덜란드에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죄목 때문에 체포되었고, 다음해에 화형을 당한다.<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38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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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모어]]에 대한 비판 ==
[[File파일:Foxe's Book of Martyrs - Tyndale.jpg|thumb|right|320px|윌리엄 틴들이 화형당하기 전에 "하나님, 영국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며 외치고 있다. 1563년[[폭스의 순교사]]에 실린 삽화]]
윌리엄 틴데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토머스 모어]]를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1531년에 [[토머스 모어]]가 쓴 《이단에 관한 대화》를 반박하는 글 《토머스 경의 대화에 대한 응답》을 썼다. 이 책의 여백에다 그는 토머스 모어를 ‘거짓의 교황!’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틴데일은 토머스 모어가 전통을 성경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이 책에서 고백성사, 순례, 사죄경, 연옥, 십자가 기둥에 기도하기 등 가톨릭 전례들을 모두 바보스러운 의식과 성사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가톨릭을 옹호하는 모어를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모어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는 이유를 “성직자의 관을 쓴 자들의 도움으로 명예와 높은 자리,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야유했다.
 
이에 토머스 모어는 분노했고 1532년에 장장 6권으로 된 책 《틴데일의 응답을 논박함》을 펴냈다.이에 끝나지 않고 그는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을 색출해 화형에 처하는데 앞장섰다. 토머스 모어는 틴데일을 교회법으로나 세속법으로 옭아매어 빠져 나갈 수 없게 만들고 틴데일의 추종자였던 ‘작은 빌니’, 틴데일의 책을 영국으로 반입했던 베이필드, 런던의 가죽 상인 존 튜크스베리를 화형시켰다. 그리고 틴데일의 영어성경과 저작들을 가지고 있던 법률가 제임스 베인햄을 잡아 모진 고문과 심문을 가했다. 하지만 그는 모진 고문 앞에서도 틴데일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그는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화형대에서도 모국어 성경을 갖는 것은 정당하며, 로마의 주교는 [[적그리스도]]이며, 연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하나님께 토머스 모어를 용서하라고 기도까지 하며 화형대에서 처형 당했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722144&code=23111626
|제목 = 성서, 영어 번역하고 화형당한 영국의 루터 윌리엄 틴데일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