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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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와 헤럴드는 제16 뉴욕 기병대 소속의 군인들이 농장에 도착할 때까지 개럿의 농장에 [[4월 26일]]까지 머물러 있었다. 군인들이 헛간을 포위했고, 그곳에서는 부스와 헤럴드가 잠들어 있었다. 군인들은 15분이 지나면 사격을 할 것이라고 알렸다. 헤럴드는 항복을 했지만, 부스는 군인들이 항복하라고 외쳤음에도 “나는 살아서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크게 외치며<ref>Swanson, p. 326.</ref>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듣자마자, 군인들은 헛간에 사격을 가했다.<ref>Swanson, p. 331.</ref> 부스는 한 손에 라이플을 휘두르며,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서 뒷 문으로 돌진했다. 부스는 어떤 무기도 쏘지를 않았다.
보스턴 코벳이라는 병장이 헛간 뒤로 기어 가서 부스를 쏘았고, 척수를 끊었다.<ref>Swanson, p. 335.</ref> 그의 총알이 링컨의 뇌를 관통했던 곳 아래 쪽으로 약 1인치 아래 쪽의 뒷 머리 부분이 었다
[[파일:Garrett Farm.gif|thumb|1865년 4월 26일 부스가 죽은 개럿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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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8명(남자 7명에, 여자 1명)<ref>Kunhardt, Dorothy, p. 188</ref> 으로 좁혀졌다. [[새뮤얼 아놀드]], [[조지 애체롯]], [[데이빗 헤럴드]], [[새뮤얼 머드]], [[마이클 오래플린]], [[루이스 파월]], [[에드먼드 스팽글러]] (포드 극장의 무대담당자로 부스에게 말을 주어 피너츠 버로우에게 잡고 있으라고 했던), 그리고 [[매리 수랏]]이었다.
8명의 용의자는 [[1865년]] [[5월 1일]] 당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군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9인 위원회는 [[데이빗 헌터]] 중령이 이끌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결정권자들은 루 월리스 소장, [[로버트 샌포드 포스터]], [[토머스 맬리 해리스]], [[앨비언 P. 하우]]와 [[오거스트 카우츠]] 준장과 [[제임스 A. 에킨]]과 [[찰스 H. 톰킨스]] 대령, 그리고 데이빗 램지 클렌드닌 중령이었다. 검찰 쪽은 군 법무감 [[조제프 홀트]]가 이끌고 있었으며, 법무관보로는 미국 의회 [[존 A. 빙엄]]과 헨리 로렌스 버넷 소령이 맡았다. 재판은 벤 피트먼과 여러 조수들이 속기록을 담당하였고, 1865년 출판되었다. [[군사법재판소]]에 그들이 재판을 받는다는 사실은 [[에드워드 베이츠]]와 [[기드온 웰즈]]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민사재판|민사 법원]]이 재판을 담당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법무부 장관 [[제임스 스피드]]는 군사적 모의가 포함되었으며, 피고가 적군처럼 행위를 했고, [[콜럼비아 특별구]]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군사법재판소의 이용을 정당화시켰다. ([[1866년]], [[밀리간 사건]](''[[w:Ex parte Milligan|Ex parte Milligan]]'') 판결에서 [[미합중국 연방 대법원]]은 민사 법원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군사법재판소의 이용을 금지했다.)<ref>Steers, pp. 213–4</ref>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유죄 평결과 2/3의 사형을 결정하는 [[배심원]]에 대해 최소한의 군인을 요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피고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또한 피고는 존슨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항소할 수가 없었다
이 재판은 266명의 증인이 소환되면서 약 7주간 진행되었다. [[구류]]에서 석방된 [[루이스 바이히만]]이 핵심 증인이었다. 피고 모두는 [[6월 30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매리 수랏]], [[루이스 파월]], [[데이빗 헤럴드]], 그리고 [[조지 애체롯]]은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새뮤얼 머드]] 박사와 [[새뮤얼 아놀드]], [[마이클 오래플린]]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머드는 군사법재판소에 5-4 한 표 차이로 [[교수형]] 당하는 것을 모면했다. 에드먼드 스팽글러는 6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상하게도, 매리 수랏이 교수형 선고를 받은 이후, [[배심원]] 중 5명이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존슨은 처형을 중단하지 않아다. (존슨은 이후 그 편지를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ref>Steers, p. 22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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