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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袁紹, ? ~ [[202년]] [[음력 5월 21일]])는 [[후한]] 말기의 군인으로, [[자 (이름)|자]]는''' 본초'''(本初)이며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명문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젊어서는 [[청류파]] 사상가로 명성을 떨쳤다. 후한의 정치적 부패를 타파하고자 [[십상시]]를 일소하였으나, [[동탁]]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는 데 실패하고 중앙에서 쫓겨났다. 원래는 중앙에서 태어난 관료 출신이었지만 사상가·정치가로서의 명망과 경력을 바탕으로 [[기주]] 일대에서 빠르게 군벌화하였고, [[한복 (후한)|한복]]·[[공손찬]]·[[장연 (후한)|장연]]·[[전해]]·[[공융]] 등의 정부 관료·군벌들을 격파·병합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조조]]에게 크게 패한 뒤([[관도대전]]) 분사(憤死)하였다202년에 병으로 죽었다. 후계자 [[원상 (후한)|원상]]은 종형 [[원담]]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난 사이에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 생애 ==
===청류 지식인으로서의 전반기 ===
원소는 고조부 [[원안]](袁安) 이후 4대 연속 [[:wikt:삼공|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용모가 수려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일을 잘 도와주어 젊어서부터 지도자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적장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그려지나, 태어날 때 부친인 [[원성]](袁成)이 죽어 유복자로 자랐으며 모친은 노비였다.<ref>한편으로는 [[원봉 (후한)|원봉]](袁逢)의 차남이고, 일찍 죽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수 (서진)|진수]](3세기), 《[[삼국지]]》 〈[[:s:삼국지 (진수)/권6|권6]]〉 〈원소전〉의 [[배송지]] 주석 중 “紹即逢之庶子,術異母兄也,出後成為子。”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이복 형에게 술수를 써서, 출생 후에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었다. ))원소가 서자라는 기록은 양쪽 설 모두 동일하다.</ref> 원소는 천출로천출이었으므로 비록 [[효렴]](孝廉) 등의 천거를 받지 않았지만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당시 삼공의 눈에 들어 삼공부로부터 직접 벽소되는 상당히 파격적인 절차로 20세의 나이에 복양장(濮陽長)으로 부임하였다. 임지에서는 깨끗한 정치로 명성을 얻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적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복상이 끝나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을 추감하며 또다시 3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이후에도 병을 핑계로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당시 후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관습이 거의 없었던 점과, 어려서 고아가 된 일을 추감하여 원소만이 다시 복상을 거친 것은 당시에는 그가 유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를 추구했던 원소는 후한 말의 부패한 정치 현실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여 벼슬길을 피한 것으로 생각된다.
 
6년의 상을 치르고 벼슬에 나서지 않는 동안에 원소는 [[장막 (후한)|장맹탁]]·[[하옹|하백구]]·오자경(吳子卿)·[[허유|허자원]]·오덕유(伍德瑜)·[[조조|조맹덕]] 등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사귀었고, 당시 후한의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비판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므로얻으며 청류파의 중심에 서게 되니 이에 환관들이 모두 원소를 미워하게 되었다. 십상시의 한 사람이자 [[후한 영제|영제]](靈帝)에게 '아버지'라고 불린 [[장양 (후한)|장양]](張讓)과 더불어 '어머니'라고 불린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은 원소에 대해 "저 아이가 끝내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원씨 가문은 환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원소의 숙부 [[원외]](袁隗)는 원소에게 "가문을 멸망시킬 작정이더냐"라고 크게 꾸짖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원소가 천거에 응하여 벼슬을 시작했다는 기록<ref>〈원소전〉의 [[배송지]] 주석 중 “紹於是乃起應大將軍之命。” (원소는 이에 비로소 다시 대장군의 명령에 응했다.)</ref> 이 있고, 끝내 원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어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184년]]([[광화 (후한)|광화]](光和) 7년) 무렵에는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의 속관으로 다시 벼슬을 시작하였다.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더 이상 조정의 혼란을 묵과할 수 없다는 청년다운 정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원소는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였으나, 사이가 나빴던 종제 [[원술]](袁術)이 상서대에 있었으므로 사직하고 무관직으로 전임해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 되었다. [[186년]]([[중평]](中平) 3년)에는 [[갑훈]](蓋勳)·[[유우 (후한)|유우]](劉虞)와 같이 금병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 주살을 도모하였으나, 갑훈이 경조윤(京兆尹)으로 전출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89년]](중평 6년), 영제가 붕어하고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하진]]에게 바쳤다.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누이동생 [[하태후]](何太后)의 반대와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데다가 그 스스로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한 것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원소는 재차 [[왕광 (후한)|왕광]](王匡)·[[정원 (후한)|정원]](丁原)·[[교모]](喬瑁)·[[동탁]] 등 지방의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여 하태후를 비롯한 환관들의 지지세력을 협박하는 계책을 세웠고 다시 [[하진]]을 설득하여 [[왕광 (후한)|왕광]]에게 강노수 5백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오도록 하는 한편 [[교모]]는 성고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동탁]]은 관중(關中)으로 오도록 하고, [[정원 (후한)|정원]]을 시켜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孟津)을 불태우도록불태운 다음 흑산적 소탕을 구실로 삼도록 했다.
 
원소의 협박이 거듭 이어지고 맹진의 불빛이 낙양에까지 비추게 되자 친 환관파 관료들은 모두가 두려워 떨며 십상시를 주살하라고 진언했으나 하태후만이 이를 듣지 않았다. 본디 십상시와 결탁하여 권력을 잡았던 [[하진]]은 이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내심 꺼려했으므로 행동이 지체되고 있었다. 원소는 [[하진]]을 만나 거듭 설득했고 이에 [[하진]]은 원소를 관리의 감찰과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례교위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리는 등 막대한 권력을 부여한다. 이에 원소는 황실의 근위병들을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하며 태후와 환관들을 낱낱히 감시했는데 마침내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십상시 이하 고위직 환관들을 모두 파직시키자 십상시들은 모두 [[하진]]에게 가서 사죄하며 오직 [[하진]]의 조치에 따르겠다며 애원한다. 원소는 [[하진]]에게 십상시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세 번이나 간하였으나 [[하진]]은 모두 듣지 않았고 십상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이를 전해들은 원소는 불같이 진노해 황급히 사병 백 명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장양 (후한)|장양]] 내각에서 임명한 친 환관파 관료들을 공격해 살해했으며 [[하진]]의 사망으로 인한 병사와 관료들의 혼란을 강경하게 수습했다. 또한 수습한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황궁을 점령했으며 붙잡은 환관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때 얼굴에 수염이 없거나 어깨가 넓거나 목소리가 가늘거나 피부가 희고 곱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된 환관들을 포함해 죽은 환관은 2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십상시의 난]])
 
하지만 원소는 정권을 잡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혼란을 틈타 [[동탁]]이 낙양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와서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였던 [[후한 소제 (13대)|소제]](少帝)는 하태후라는 후견인이 존재하였으며 이미 나이가 많아 [[동탁]]이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동탁]]은 황제의 폐위를 획책하였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동탁]]과 심하게 반목하였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때 원소는 폐제를 획책하는 [[동탁]]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나 [[동탁]]은 칼을 어루만지며 "내가 하고자 하는데 안 되는 게 무엇이냐. 감히 애송이 녀석이 내가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원소를 협박하였다. 이에 원소가 "천하에 힘있는 자가 어찌 동공 뿐이겠습니까!"라고 분연히 말하며 칼을 뽑아든 채로 인사하고 나가버려 <ref>〈원소전〉“〈《獻帝春秋》曰:[...] 卓謂紹曰:「豎子!天下事豈不決我?我今為之,誰敢不從?爾謂董卓刀為不利乎!」紹曰:「天下健者,豈唯董公?」引佩刀橫揖而出。”</ref>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곧바로 원소는 인수(印綬)를 낙양의 성문에 걸어놓고는 그대로 낙양을 떠나 발해(渤海)로 갔다. [[동탁]]은 본래 원소를 죽이려 하였으나, 조정에 원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자 마침내 회유책을 써서 원소를 발해태수(勃海太守)로 임명하였다.<ref>〈원소전〉 [...] 卓以為然,乃拜紹勃海太守,封邟鄉侯。</ref> 동탁은 하태후를 죽였다.([[189년]] [[9월 30일]]/[[음력 9월 3일]]) <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丙子,董卓殺皇太后何氏。”</ref>
 
===반동탁연합===
이때 [[공손찬]]의 진형이 무너지자 승리를 확신한 원소가 방심하여 보병 수십 명만 이끌고 [[공손찬]]이 패퇴하는것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다가 퇴각하던 [[공손찬]] 휘하의 기병대 수천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는데, 군사 [[전풍]](田豊)이 원소를 구해 담 사이에 피난시키려고 하자 모자를 벗어 집어던지며'''"대장부라면 응당 적에게 돌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담장 사이로 몸을 숨긴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나아가 싸워 이에 모든 병사들이 분발하였다. [[공손찬]]의 병사들은 적의 병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휘관이 원소일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였고, 의외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기가 눌려 퇴각하였다.
 
[[공손찬]]은 비록 계교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여러 곳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초평 4년([[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지만 이 직후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져 크게 신망을 잃고 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맺었다.
 
초평 4년([[193년|193]]), 흑산적의 총수 [[장연 (후한)|장연]]은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틈을 타 원소의 근거지인 [[업 (지명)|업]](鄴)을 습격하여 위군태수(魏郡太守) [[율성]](栗成)을 죽였다. 이때 원소군의 수뇌부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화친을 맺어 박락진(博洛津)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업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였고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는 평소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하였다. 혼란을 수습한 원소는 업으로 진격하였고, 창암곡(蒼巖谷)에서 흑산적 두목 우독(于毒)과 장안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壺壽)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참하였으며, 녹장산(鹿場山)에서 좌자장팔(左髭丈八)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또한 다시 청우각(靑牛角)·이대목(李大目)·황룡(黃龍)·좌교(左校)·유석(劉石)·우저근(于氐根) 등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수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업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으며, 이후 흑산적과 교전을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상산(常山)에서 [[장연 (후한)|장연]]까지 격파하였다. [[장연 (후한)|장연]]은 상산전투 이후에도 원소의 집요한 군사·외교적인 공격을 받아 점차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공손찬]]은 화친을 맺고 후퇴하였으나 장연의 공격으로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해에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지고 명망 높은 황족 [[유우 (후한)|유우]]를 죽인 일로 인해 신망을 완전히 잃었으며, 점점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잔인성이취하지 두드러졌다못하였다. [[장연 (후한)|장연]]과의 싸움을 끝낸 원소는 [[유우 (후한)|유우]]의 아들 [[유화 (후한)|유화]](劉和)를 앞세워 [[공손찬]]에게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는데, [[공손찬]]의 악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맞이하였다. 또한 원소는 [[오환]](烏丸)·[[선비족|선비]](鮮卑)·[[흉노]](匈奴)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유화책을 펼쳤고, 평소 [[공손찬]]의 강경책에 시달려 오던 이들도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흥평]](興平) 2년([[195년|195]]),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易京)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다.
본디 군웅할거 초반의 [[조조]]는 식견과 안목에 있어서도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했으며, 원소의 도움을 받고서야 군벌로서 어느 정도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조조]]가 황제를 옹립함으로써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조조]]를 다소 얕보고 있었던 원소는 그제서야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원소는 헌제에게 상소문을 써 바침으로 일단 황제의 권위에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으나, 이에 고무된 [[조조]]가 스스로 대장군에 오르고 원소를 실권이 아래없는 반열인직위인 태위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또한 [[조조]]에 대해 "수차례나 죽을 지경에 놓인 것을 그때마다 번번이 구해주었더니 이제는 황제를 끼고서 나에게 호령하는구나."라고 말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비록 명분적 우위를 차지했으나 당시 세력면에서 원소의 상대가 되지 않던 [[조조]]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대장군의 지위를 포기하고 원소에게 양보했다.
 
이렇듯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원소와 [[조조]]의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이 났고, 헌제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의 1인자도 원소가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양자의 충돌은 이미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다.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 (후한)|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 (후한)|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 (후한)|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 (후한)|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 [[저수 (후한)|저수]](沮授)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다.
 
이때 원소는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의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이 죽음으로써 후계문제에 혼선이 생길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소가 병으로 급사함에 따라 나이가 어렸던 [[원상 (후한)|원상]]은 그 지지기반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서 집권하게 되었으며, [[원담]] 또한 청주의 도독으로서 독단적인 행동이 가능한 위치였으므로 이는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 무렵부터 원소는 정권의 2인자였던 [[저수 (후한)|저수]]와 별가(別駕) [[전풍]]을 대표로 한 기주의 호족·명사 계층과의 대립이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곧 본격적인 원소의 남진이 시작되었다. 원소군은 국지전에서 [[안량]](顔良)과 [[문추]](文醜)와 같은 유력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었지만, 사실 전황 자체는 순조로운 원소군의 우위로 진행되었으며 철수를 거듭하던 [[조조]]는 군세를 모아 관도에서 원소를 요격했으나, 대패하여 굳게 진영을 지킨다. 원소는 관도를 포위공격했으나 조조군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므로 3개월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조조]]가 관도에서 고립되고 전황이 [[조조]]에게 점점 불리하게 되자, 원소의 선동공작이 효과를 거두어 [[조조]]의 세력권 내 여러 곳에서 원소에 호응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특히 예주의 경우는 단지 양안군(陽安郡)만을 제외한 모든 군현이 원소에게 호응해 반기를 들 정도였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조조]]는 패배직전의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원소의 참모 [[허유 (후한)|허유]](許攸)는 자신의 비리가 드러난 것이 두려워 원소를 배신하며 [[조조]]에게 원소군 군량고의 위치 등의 기밀 정보들을 가르쳐 줬는데. 그 결과 오소(烏巢)의 보급기지는 [[조조]]에게 함락당했으며 그 책임 소재를 두고 간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끝에 [[장합]](張郃)과 [[고람]](高覽)이 원소를 떠나 [[조조]]의 밑으로 갔다. 이때 둘은 원소를 공격하고 진영을 불태워버린 뒤 [[조조]]에게 투항했는데, 이로 인해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총대장 원소의 생사조차 불분명해졌으므로 사실상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어 어이없이 괴멸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원소의 영지 내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후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공격해 평정하였다(201년 4월).
원소는 사람됨이 관아하였으며 올곧고 바른 정치를 펼쳐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불만을 내는 목소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소가 죽자 지체높은 사대부에서 시골의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하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죽음을 비통해하여 온 거리와 저자에 통곡이 끊이지 않았고, 간혹 원소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것처럼 상을 치르는 자도 있었다.<ref>《헌제춘추(獻帝春秋)》</ref>
 
비록 원소가 생전 [[원상 (후한)|원상]]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원상 (후한)|원상]]은 장성하지 못했던 데다가, 원소 역시 유조를 남기지도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원소가 죽었기죽을 때문에 때문에나이가 어린어렸던 [[원상 (후한)|원상]]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원담]]은 노골적으로 [[원상 (후한)|원상]]을 거역하며 대립했으며, 결국 실패하게 되자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와 같이 [[원상 (후한)|원상]]을 공격했다. 또한 [[고간 (후한)|고간]] 역시 표면적으로는 [[원상 (후한)|원상]]을 따랐으나 한편으론 은밀히 자립을 획책하여 [[원상 (후한)|원상]]이 [[조조]]와 [[원담]]에게 협공당하는 위기에 빠지자 [[원상 (후한)|원상]]을 배신했으며 군사를 이끌고 업을 습격해 전복시킬 계획을 세운다배신했다. 결국 건안 9년([[204년|204]])에 [[조조]]에 의해 업이 함락되면서 원소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원담]]은 업이 함락된 이후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홍 (조위)|조홍]](曹洪)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205년 1월)
 
[[원상 (후한)|원상]]은 각지를 망명하며 재기를 도모하지만 최후엔 요동에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살해당하여 그 수급이 [[조조]]에게 보내진다. (207년 9월,혹은 10월)
 
[[고간 (후한)|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군사를 이끌고 업을 습격해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호관에서 저항하다가 [[유표]]에게로 도주하려 했으나 도중에 상락현에서 왕염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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